법정서 모유 먹이며 변론 괜찮나" 묻자 "그런 것 신경 쓸 겨를 없어요"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박주연 오피니언팀장 입력 2018.10.20. 06:00 수정 2018.10.20. 14:31[경향신문] ㆍ‘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변호사
세 아이의 엄마며 비영리 1인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변호사 목포 아동학대 사건은 ‘인공 안구’를 빼 보이며 변론도 했다 태어날 때 의료사고로 한 눈을 잃었지만, 씩씩하게 자랐다
지난해 7월 광주지법 목포지원의 한 법정. 친모 동거남의 무차별 폭행으로 한쪽 눈을 실명해 영구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동(5)의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판부에 양해를 구한 그는 즉석에서 자신의 오른쪽 눈의 ‘인공 안구’를 꺼내 보였다. 순간 법정은 술렁였다. 그는 “어릴 적 의안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며 “이 아이가 나와 같은 괴로움으로 유년 시절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안을 바꿔서 넣을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며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피해아동을 생각해서 가해자들에게 법정 최고형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동거남에게는 징역 18년, 폭행을 방조한 친모에게는 징역 6년의 중형이 각각 선고됐다.
이 변호인의 이름은 김예원(36·사법연수원 41기)이다. 비영리 1인 법률사무소인 ‘장애인권법센터’를 운영하며 장애인·여성·아동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지원하는 공익 변호사다.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는 요즘 생후 100일을 갓 넘긴 자신의 셋째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하면서 법정에서 변론을 하고 있다. 지난 16일과 18일 양일에 걸쳐 김 변호사를 만났다.
- 왜 갓난아이를 법정에 데리고 다니는 건가요.
“아이가 아직 너무 어려서 보육시설에 맡기는 게 내키지 않는 데다 제가 일을 쉴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요. 수임료를 받지 않는 일이라고 해서 소홀히 할 사건들이 아니거든요. 수십년간 노예생활을 한 분도 있고, 성폭력 피해를 당해 하루하루 재판날짜만 기다리는 분도 계시고요. 또 형사재판은 피해자 대리인의 일정까지 고려해 재판날짜를 잡지 않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니는 거예요.”
- 보통은 이럴 경우 친정이나 시댁 등에 아기를 맡기던데요.
“양가 부모님이 모두 일을 하세요. 사시는 곳도 멀고요.”
- 기관이든 보모든 돈으로 노동력을 살 수도 있잖아요.
“올해 만 다섯 살인 첫째딸은 생후 82일 되던 날부터 영·유아 보육시설에 보냈는데 후회해요. 젖먹이가 엄마와 떨어져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거든요. 그래서 둘째(두 살 된 아들)를 낳았을 때는 제가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에서 일할 때라 1년간 육아휴직을 했어요. 그런데 셋째(아들)는 자영업자 신분인데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아이를 둘러업고 다니는 거예요.”
- 젖을 물린 채 법정에 들어가는데, 판사나 방청객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는 않습니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일단 젖을 물려놓는 이유는 아기를 조용히 시키기 위한 거예요. 아이가 낑깽대거나 울면 안되니까요. 공갈 젖꼭지는 짜증내고 밀어내거든요. 젖을 물린 후 아기띠의 머리 씌우기를 올리면 제 가슴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아요(웃음).”
-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나 라리사 워터스 호주 상원 의원 등 외국의 여성 정치지도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모유를 수유하면서 의정활동 등을 한다지만, 한국에서 전문직 여성의 이런 모습은 보기 어렵잖아요. 판사들이 당황하겠는데요.
“죄송스럽긴 하죠. 법정에 처음 셋째를 데리고 들어간 때는 생후 50일쯤인데, 비공개로 진행된 강간사건 재판이었어요. 의아한 표정의 법정경위에게는 제가 피해자 대리인임을 확인해주고서야 입장할 수 있었죠. 젖을 물린 아이가 깰까봐 토닥토닥 다독이고 흔들며 검사 쪽에 선 채로 재판진행을 듣고 있는데, 판사님이 ‘거기 아기 안으신 분은 누구세요?’라고 물으셨어요. 다행히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 남편도 판사(강지성 서울북부지법 판사)인데, 모유 수유를 하며 법정 변론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물은 적이 있어요. 당신이 재판하는데 여성 변호사가 모유 먹이며 변론을 하면 어떨 것 같으냐고. 딱 한마디 하더라고요. ‘법원의 인식변화에 좋은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요. 그래서 용기를 냈어요.”
- 위 두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나요. 어린이집이 끝나면 누가 돌보나요.
“제가 가급적 오후 4시30분에 퇴근해 5시에 어린이집으로 데리러 가요.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 집안일하고 재우다 보면 4~5시간이 후딱 가죠. 아이들이 잠든 후 저는 다시 일을 하는데 일과 육아를 병행하려니 탈진할 만큼 너무 힘들어서 최근 공고문을 붙여 이웃들에게 도와달라고 하소연했어요. 다행히 며칠 전 이웃의 할머니 한 분이 제가 외부출장으로 너무 바쁜 날엔 저녁시간에 두 아이를 봐주겠다고 하셨어요(웃음).”
그가 왜 공익 변호사가 됐는지 궁금했다. 듣고 보니 출생 순간부터 ‘운명’적인 부분이 있다. 두 번에 걸친 의료사고로 오른쪽 눈에 영구 장애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각장애 6급이다. 그는 “장애를 입은 이유를 중학생 때 엄마에게 처음 들었는데 의료진에게 법적 책임을 물으려 해도 시효가 지나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며 “세상에는 나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았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그때부터 법조인을 꿈꿨다”고 말했다.
- 어쩌다 의료사고가 난 겁니까.
“태어날 때 의사가 겸자분만(쇠로 만든 큰 집게 등으로 태아의 머리를 집어서 잡아당기는 분만 방법)을 시도하다 도구가 눈을 찍었다고 해요. 생후 100일이 지나도 눈을 못 뜨고 울기만 하자 엄마가 서울의 큰 병원에 저를 데리고 가셨대요. 눈동자가 터진 줄 몰랐던 의사는 안압이 높으니 눈암일 가능성이 높다며 조직을 빨리 떼어내자고 했대요. 그런데 오진이었어요. 눈동자만 터졌으면 의안을 해도 티가 덜 났을 텐데, 안구는 물론 주변 신경과 근육조직까지 완전히 들어낸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입은 거예요.”
실제로 인터뷰 중 의안인 그의 오른쪽 눈은 깜빡이지도, 감기지도 않았다. 특히 그가 시선을 아래로 둘 때 양쪽 눈의 불균형이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갓난아이 때부터 의안을 해야 했고, 얼굴뼈가 자라는 속도에 맞춰 새 의안으로 바꿔줘야 했다”며 “성인이 된 후에도 1년에 한번씩 의안을 교체하고 소독도 1시간에 한번씩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남들과 조금 다른 외모로 인해 상처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어릴 때 놀림을 많이 당했고, 저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제가 때린 기억이 많아요. 제가 힘이 세고 씩씩했거든요(웃음). 어느날 방과 후 집에 오는데 아이들이 따라오며 ‘개눈깔이래’ 하면서 놀렸어요. 그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된 엄마가 펑펑 우시더라고요. 철없던 저는 ‘내게 늘 있는 일인데, 엄마에게는 속상한 일인가?’ 생각했어요.”
- 그래도 마음이 강한 아이였나봐요.
“중학생 때도 왕따를 당했지만 또래의 놀림이나 따돌림은 제게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성격이 밝고 공부를 잘해 어느 시점부터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거든요. 그보다 저를 압박한 것은 아빠에 대한 두려움이었어요. 지금은 손주들의 자상한 할아버지이시지만, 젊은 시절 아빠는 몹시 엄하고 무서웠어요. 체벌도 잦았고요. 악의가 없더라도 어른의 강한 감정 표출이 아이에게는 큰 공포가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아동학대 사건을 접할 때 아이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런 환경에서 학업성적이 좋았군요.
“엄마가 삶을 너무 힘들어하실 때가 많아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제가 고교생일 때는 아빠가 빚보증을 잘못 서 집도 날아갈 위기였고, 소송에도 휘말렸죠. 서울 소재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4년 장학금을 받고 집(춘천)에서 가까운 강원대 법학과에 입학한 것도 그런 환경 때문이었어요. 아래 두 동생도 챙겨야 하는데 저는 어차피 사법시험만 통과하면 되니까요.”
사시에 합격하고 공익법인에서 장애인 인권 사건들을 담당 늘 시간에 쫓기지만, 일과 육아가 분리돼 있다고 생각 안 해 큰아이가 암투병을 하면서 ‘하루하루의 감사함’을 깨달았고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함께 손잡고 가는 세상을 꿈꿔
그는 대학을 졸업한 2006년 상경해 신림동 고시촌에서 지냈고, 2009년 사시에 합격했다. 2012년 사법연수원 수료 후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만든 공익재단법인 ‘동천’에 입사했다. 주로 장애인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를 대리했다. 2014년부터 3년간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 상임변호사로 근무한 후 2017년 홀로 장애인권법센터를 설립했다. 그는 “장애인단체들과 연대해 활동영역을 전국으로 확장하고 싶었고, 여성·아동사건도 병행하면서 법제도 개선에도 나서고 싶었다”고 말했다.
-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눈을 뜬 계기는 ‘동천’ 입사였나요.
“사법연수원 2년차인 2011년 변호사 실무수습을 하면서였어요. 난민지원, 성폭력상담소, 장애인단체 등에서 실무를 했는데, 장기간 지속적으로 인권 피해를 겪은 사회적 약자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리고 이들을 보호할 법적·제도적 장치가 미비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죠.”
- 그래서 힘들고 가난한 공익 변호사의 길을 줄곧 걸어온 건가요.
“동천에 입사하고 얼마 안됐을 때인 2012년, 강원 원주 사랑의집 사건(시설 대표가 지적장애인들을 입양해 학대하고 장애인 수당과 후원금을 가로챈 사건) 피해자들의 법률지원을 했는데, 분노가 치밀었어요. 그 비인간적 삶의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거든요. 동시대를 살면서도 이분들은 자신의 출생연도, 가족, 심지어 성별이 뭔지도 모른 채 살았어요.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국가도 도움을 안 줬죠. 당시 여러 인권단체와 연대해 일했는데 역동적이고 재밌고, 보람 있었어요. 평생 이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 변호사로서 돈을 벌려고 작정하면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잠시 생각하더니)가치판단의 문제 아닐까요? 좋은 집, 좋은 차를 갖는 게 중요한 사람도 있지만, 저는 유한한 시간을 부를 쌓는 데 쓰기보다 제가 생각하기에 의미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게 더 소중해요.”
갑자기 생각난 듯, 그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농장에서 30년간 임금도 못 받고 노동력을 착취당했다는 한 초로의 지적장애 남성이 웃는 얼굴로 김 변호사와 함께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어설픈 V자를 그리고 있었다.
“제가 하는 일은 미약할 수 있지만 이런 분들은 인생이 바뀌어요. 그걸 지켜볼 때 되게 기뻐요. 음… 이런 분들은 돈을 주고 사건을 의뢰할 처지가 못 되고 법률구조공단은 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하면 기쁘고 그래서 하는 거예요.”
- 활동비조차 벌기 어려울 텐데, 아이 셋 키우며 경제적으로 팍팍하지 않나요.
“절약하면서 살아요. 궁상 떤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한 장에 5만원씩 하는 임부내복도 5년 전 남이 입던 것을 4장에 2만원에 팔길래 지금까지 너덜너덜해지도록 입었어요. 아이들 옷도 다른 집 아이들이 작아서 못 입는 옷 가져다 입히고요(웃음).”
- 남편과 매달 수입의 10~20%를 기부하던데, 기부는 몇 개 단체에 합니까.
“35개 단체예요. 남편은 사법연수원 동기로 만나 2012년 1월 결혼했고, 수입의 일정 비율을 기부하는 것은 결혼할 때 우리의 약속이었어요.”
그가 그동안 상담·자문·소송 등 법률지원한 사례는 1000건이 넘는다. 6년간 싸워 시각장애인도 1종 운전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이끌어낸 것을 비롯해 불합리한 제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 3월과 4월 각각 제1회 곽정숙인권상과 서울시 복지상 대상도 수상했다.
-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사건을 계기로 종전 자신의 모습을 깨고 일어서는 피해자들을 볼 때예요. 사람은 지속적인 학대 상황에 놓이면 무력감, 우울감에 눌려 입도 뻥긋 못해요. 저는 ‘나는 당신 편이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 다 들을 수 있다. 내가 돕겠다’고 말해줘요. 그러면 어느 순간 그동안 함구해온 이야기들을 그분들이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하고, 종국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생각해요. 가해자에게 당당히 잘못을 묻고 법정에서 진술도 하죠.”
- 인생 신조 같은 게 있습니까.
“사실은 제가 만삭이던 지난봄에 첫째아이가 많이 아팠어요. 목이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갔는데 혈액암 진단을 받았거든요. 암덩어리가 목뼈를 녹여 경추 하나가 없어진 상태였어요. 전신마취 후 응급수술로 녹은 목뼈를 빼내고 인공뼈를 박아야 했어요. 다행히 다른 곳에는 전이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전이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 중 아이의 뇌에서 혹이 발견돼 제거수술을 또 받아야 했어요. 큰 수술을 두번이나 견뎌내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찢어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평범한 이 하루하루의 일상이 너무 감사해요.”
- 아이는 이제 괜찮나요.
“씩씩하게 어린이집에 잘 다녀요.”
- 그래도 이런 경우엔 엄마가 일을 쉬면서 아이를 돌봐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저는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해요. 첫째가 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는 제가 지적장애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며 동분서주할 때였어요. 아이에게 ‘오늘 엄마가 어떤 언니를 만났는데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말해주면 아이도 ‘엄마 파이팅’ 하고 응원해줘요. 저는 일과 육아가 분리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을 줄일 수는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대신 아이 챙기는 게 1순위죠.”
- 어떤 삶과 세상을 꿈꿉니까.
“초심을 잃지 않고 제가 이 일을 오래오래 하면 좋겠고, 아이들이 우리 부부가 만든 가정 안에서 행복하게 자라길 바라요. 또 사람은 누구에게나 외모든 내면이든 혹은 다른 어떤 것이든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약한 부분이 있잖아요. 타인의 그 약한 부분을 혐오하지 말고,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고 같이 손잡고 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박주연 오피니언팀장 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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