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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천민' 비정규직- 부모 세대는 '혹독한 노동' 자녀 세대는 '불안한 고용'

천하한량 2015. 10. 16. 00:40

“‘살찐 돼지는 사람보다 낫다’는 패라독스가 당연한 논리로 통하는 세상.”(1964년 5월26일자 경향신문 ‘허기진 군상-서울의 H동’). 도시 노동자에게 1960년대는 빈곤의 시기였다.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인 비지를 얻기 위해 새벽 2시부터 길게 줄을 섰다. “지게벌이를 해서 하루살이를 해나가는 노동자나 논밭을 팔고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이농민들이 단골 구입객”이었다.

■ “사람값이 가장 싼 코리아”

급속한 산업화로 농촌을 떠나 일자리를 구하려는 농민들이 도시에 몰려들었다. 박정희 정권의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은 주로 여성 노동력에 의존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많은 수가 섬유·전자 등 경공업 분야에 몰렸다. 대다수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반숙련 노동자였다.

이들은 공장 기숙사나 ‘벌집’이라고 불리는 자취방에 살며 월급으로 번 돈을 고향으로 부쳤다. “서른일곱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 <외딴방>에 묘사된 벌집의 모습이다.

수출산업을 떠받친 이들도 ‘여공’이었다. 경향신문은 1965년 1월25일자 ‘여적’에서 “여공 월당이 2000원에서 3000원 내라니 아마도 세계에서 사람값이 가장 싼 것이 ‘코리아’가 아닐지”라고 지적했다.

1974년 구로공단에 세워진 ‘수출의 여인상’은 “가난한 나라에서 수출한국의 명성을 만방에 알린” 여공을 잔다르크로 묘사했다. 그러나 공단의 노동 여건은 잔다르크도 감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노동자들은 ‘타이밍’이라고 불리는 각성제를 먹어가며 하루 12~15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을 견뎠다. 한 여성노동자는 “우리들은 마치 돼지가 주인에게 자기 몸을 주기 위해 살찌우는 것과 같이 밥을 먹고 일하기 위해 잠을 잤다”고 회고했다.

김민기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석정남이 쓴 <공장의 불빛>이라는 수기를 1978년 동명의 노래굿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 담긴 ‘야근’이라는 노래는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 실태를 이렇게 고발한다. “서방님 손가락은 여섯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개에 오만원씩 이십만원에/ 술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울고짜고 해봐야 소용있나요/ 막노동판에라도 나가봐야죠/ 불쌍한 언니는 어떡하나요/ 오늘도 철야명단 올렸겠지요.”

1974년 신동아 11월호에 실린 ‘르포 근로자’는 마산수출지역에서 산재를 당한 뒤 자살한 노동자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철판을 자르는 일을 하던 노동자가 손가락 3개가 끊어졌는데 회사 측은 두 달치 월급과 치료비 3만원을 주고 해고시켰다. 이 노동자는 병신된 것을 비관해서 자살했다. ‘손가락 하나에 1만원’이라는 우울한 유행어가 나돌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구 평화시장의 어린 여공들이 1980년 4월 생존권 사수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 외환위기로 꺾인 노동권

처참한 노동환경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렀다. 1970년대 경공업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민주노조운동은 1980년대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함께 대규모 노동자 집단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조직 노동운동으로 발전했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 대투쟁’ 기간 중 3000건 이상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전 20년간 발생한 전체 노동쟁의 발생 건수를 넘는 수치였다. 파업의 핵심 구호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가 내걸렸다. 1년간 4000여개의 노조가 새로 결성됐다.

1987년 6월 삼성중공업 창원공장 노동자들이 중장비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도입과 함께 노동의 사회적 발언권은 급격히 축소됐다. 1998년 2월 정리해고제가 도입됐고, 간접고용을 허용하는 파견법이 세상에 나왔다. 많은 노동자가 한꺼번에 거리로 내몰렸다.

1998년 10월8일자 경향신문 창간 52주년 기획 ‘IMF를 넘는다’ 기사는 “홍콩의 모은행 한국지점에 60명의 직원을 뽑는 데 무려 1만여명의 경력사원이 몰린 상황”을 소개하며 “평생직장의 개념은 여지없이 무너졌다”고 보도했다.

1998년 4월 선원 일자리를 얻으려는 실직자들이 부산 서구 충무동 부두에 모여 있다.

‘최대 유행어는 퇴출’이라는 제목이 달린 같은 날 기사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신년벽두부터 감원 바람에 떨었던 직장인들에게 ‘박카스’는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청소부 아버지를 도와 새벽일을 나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힘들지.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고 말하는 박카스 방송광고의 카피를 빗댄 것이었다. 해고통보를 받은 직장인은 ‘박카스를 마셨다’고 자조했다. 퇴근 무렵 ‘내일 또 봅시다’라며 주고받는 인사말에는 상투어 이상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 839만명의 장그래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노동 유연화 정책의 결과는 ‘현대판 신분제’로 불리는 비정규직의 대량 양산이었다. 2001년 737만명으로 집계됐던 비정규직은 2015년 현재 839만명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말 비정규직의 직장 분투기를 담은 웹툰 <미생>과 동명의 드라마가 붐을 일으켰다. 청년 비정규직을 상징하는 ‘장그래’의 이름을 놓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하려는 정부와 반대하는 노동진영이 ‘이름 쟁탈전’을 벌였다. 올해 상반기에는 ‘내 꿈은 정규직’이란 모바일 게임이 직장인 사이에서 유행했다. 인턴에서 시작해 ‘갑’의 위치인 사장까지 도달하는 것이 목표인 이 게임의 사용자들은 “현실인지 가상인지 모를 웃픈 현실”을 자조했다.

갈 곳 없는 노동자들은 더 높은 곳으로 몰렸다. 농성 현장의 요구안은 1970~1980년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4년 타워크레인 기사 500명이 ‘근로계약서 체결’을 요구하며 전국 100여곳의 타워크레인에 올라 집단 고공농성을 벌였다. 2005년에는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이 ‘화장실을 지어달라, 식당을 만들어달라’며 정유탑에서 고공농성을 했다.

2012년 4월 서울 덕수궁 앞에 마련된 쌍용자동차 해고 희생자 추모 분향소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

2011년 대한민국 1호 여성 용접공 김진숙은 자신의 동료가 고공농성 129일 만에 목매 숨진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펼쳤다. 지난 4월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 차광호는 408일 농성을 벌여 고공농성 세계 최장기록을 갈아치웠다.

장그래 살리기 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달 17일 서울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시국농성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의 집계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발생한 노동자의 고공농성은 총 108건. 기간을 모두 더하면 12년(4380일), 높이를 더하면 1389층 건물 높이(4166m)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난쟁이는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를 꿈꾸었다. 작가 조세희는 더 이상 이 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를 바란다고 했지만, 난쟁이가 꿈꾼 세상은 더욱 멀어져 버렸다. 비정규직 ‘미생’들은 오늘도 고공에 오른다. 난쟁이가 사다리를 타고 굴뚝에 올라 다른 세상을 꿈꿨던 것처럼.

<선명수·배장현 기자 sm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