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자료실 ▒

애국가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천하한량 2015. 8. 13. 17:00

[오마이뉴스 김행수 기자]

올해가 광복 70주년이란다. 정부는 최근 광복절 전날인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고 관공서, 기업을 가리지 않고 거리의 큰 건물에는 대부분 대형 태극기가 걸렸다. TV에서도 끊임없이 광복의 의미를 새기는 특별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고 있다. 독립군들의 활동을 모티브로 한 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을 지목하며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 배례(국기에 경례)"를 한다며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애국가 4절 완창을 못한다며 검사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특히 최고 정치인들이 '애국'을 입에 담는데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태극기만 보면 자동으로 국기에 경례를 하는 사람, 애국가 4절까지 외워서 부르는 사람은 애국자라는 것인가?

친일파 작사, 작곡 노래가 애국가라니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진 윤치호는 1급 친일파이며, 그의 아버지와 4촌들, 당조카 등 3대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명단이 수록되었다. 그의 친일 행적은 지금 읽어보아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 김행수(편집)
우리나라의 국가(國歌)인 애국가(愛國歌)는 안익태가 작곡하고 윤치호가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치호로 '알려졌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윤치호가 유력한 작사자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윤치호 외에 안창호, 민영익, 또는 공동작사설 등이 존재한다(윤치호 작사설이 현재까지는 유력설이니 이 글은 이를 전제로 한다).

친일 인사로 알려진 윤치호는 친일파 윤웅렬의 아들이다. 아버지 윤웅렬은 한때 개화운동에 앞장섰으나 대한제국 시기 군무 대신 등 요직을 거치고, 1910년 국권이 상실된 후 일제가 주는 귀족인 남작(男爵)을 수작하며 2만5천 원의 하사금까지 받은 친일파로 전락한다. 구한말 일본인들과 친일 세력의 정착과 확장을 도운 것으로 알려진 그의 선정비가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광주공원에 서 있다. 윤웅렬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賣國)과 수작(授爵)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수록되었다.

윤웅렬의 친일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1911년 윤웅렬이 사망한 후 남작 작위는 장남인 윤치호에게 승계됐다. 그는 국채보상운동으로 모은 성금 중 일부를 납부자들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납부자를 알 수 없다는 핑계로 조선총독부에 갖다 주는 황당한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한때 개화 지식인이었던 윤치호 역시 중추원 간부, 제국의회의원, 친일단체 간부와 활동 등으로 아버지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윤웅렬의 조카(윤치호의 4촌) 형제들인 치오, 치소, 치영 등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명단에 올랐으며, 윤치오의 아들인 윤명선까지 만주에서 벌인 반민족 행위로 명단에 올랐다. 아버지와 아들, 조카와 종손에 이르는 3대 친일파 집안이라는 오명을 씻을 길이 없어 보인다.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와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윤치소(윤웅렬의 조카이자 윤치호의 4촌)의 아들이 윤보선 전 대통령이다. 애국가 작사자로 알려진 윤치호 집안이 3대에 걸친 친일파 집안인 것인 분명해 보이는데, 그는 어느 정도의 친일 반민족행위를 저질렀을까?

 윤치호
윤치호는 한때 대한자강회와 신민회에 참여하는 등 구한말 개화지식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남선이 3.1운동을 앞두고 찾아가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한 걸 거절한 것으로 보아, 1910년대부터 이미 친일의 길로 접어든 듯하다. 평생 일기를 써왔다는 그의 일기를 보면 이런 변절의 싹이 젊었을 때부터 보인다.

"내 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흠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 견디겠도다"(1888.12.29 일기).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1893.11.1 일기)

젊은 시절의 일기장에 나타난 조국에 대한 냉담함과 일본에 대한 동경심은 1920년대 경성교풍회, 동문회 등 각종 친일단체에 참여하면서 친일파 확신범으로의 전향을 예고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1940년대부터 '황국신민으로서 일제에 충성'을 호소하고 '일제의 징병에 협력할 것'을 공개적으로 권유한다. 귀족 작위도 모자라 중추원 고문·대화동맹 위원장을 넘어 1945년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으로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에 선임된 인사는 단 10명이었으니, 친일파로서 그의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천황 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 하신 성의를 봉대하여 내선일체를 주장하시는 미나미(南) 총독은 우리 반도의 '아버지'라고, 우리 민족의 경애를 받고 계십니다. 미나미 총독이 총을 메고 나서라거든 총을 메고 나섭시다. 곡괭이를 메고 나서라거든 곡괭이를 메고 나섭시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우리 반도 민중도 내지 동포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살고 나라를 위하여 죽자'고 각오합시다."(1941.9. '극동(極東)의 결전(決戰)과 오인(吾人)의 각오')

"금번(今番) 일본제국이 영미(英米)를 상대로 일어선 전쟁은 동양 민족을 영미의 압박 하에서 구해내자는 동양민족 해방의 성전(聖戰)인 것이외다. 그러므로 동양 사람이 되어가지고는 누구나 이 싸움에 나서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1941.12. '결전체제와 국민의 시련' 강연문)

당시 그가 한 강연 내용 중 일부다. 윤치호는 일본 왕을 천황 폐하라 부르고 조선 총독을 조선인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일본을 위해 죽자는 각오를 다진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동양민족 해방을 위한 성전(聖戰)이라고 주장한다. 침략전쟁에 협력해야 한다며 '황군 위문금', 국방헌금과 비행기 구입비를 헌납하고, 각종 시국강연회와 언론 기고를 통해 징용과 징병을 독려했다. 조선 청년들에게 일제의 총알받이가 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이런 일급 친일파, 반민족 인사가 가사를 지은 것으로 알려진 노래를 우리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오늘도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안익태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스승은 나치 부역자

 안익태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 역시 친일반민족인사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가락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던 것이 아니다. 애국가 가사는 지금과 비슷했지만 애국가 가락은 천차만별이었다.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이나 영국 국가, 심지어는 찬송가에 가사만 붙여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랬던 것이 1948년 정부 출범식 때 안익태가 작곡한 지금의 애국가 가락이 사용되면서 국가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애국가는 법률로 우리 국가로 지정되지 않고 있다.

안익태의 친일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미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2000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에서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활동한 자료가 공개되면서 안익태도 친일 반민족인사 명단에 오르게 된다.

<월간 객석> 2006년 3월호(송병욱 기고문)에 의하면, 안익태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이 중국과 대륙으로 본격 진출하려고 교두보로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이던 1942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열린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악단을 지휘하며 자신이 작곡한 축전음악 '만주국(만주환상곡)'을 연주했다.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일본명 이키타이 안)가 독일에서 했던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 연주회 장면. 가운데 거대한 일장기가 걸려있고, 그가 곡을 쓴 친일음악을 지휘한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음악가는 나치 부역 음악인이었다.
ⓒ 송병욱(인터넷 캡쳐)
당시를 녹화한 영상에는 '만주국 창립 10주년 축하 음악회'라는 독일어 자막이 찍혀 있고, 콘서트홀 중앙엔 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다. 일본과 만주국의 영광을 기리고, (나치) 독일 및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건승을 비는 내용의 가사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였던 에하라 고이치가 썼다. 당시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한 안익태의 주소지는 에하라 고이치의 집이었다.

여기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노래에 그가 직접 초연 연주회를 지휘한 것이 만주환상곡이다. 그의 스승으로 알려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에 부역한 음악인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 외에도 헝가리 등에서도 일장기를 가운데 걸고 에텐라쿠 등 일제를 찬양하는 음악을 지휘하는 그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자료들이 공개되어 있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공개한 송병욱씨는 안익태가 일제 패망 이후 '만주환상곡'을 연주할 수 없게 되자 '한국환상곡'에 이 곡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만주환상곡'과 '한국환상곡'의 선율이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일본왕 기원 2600주년 봉축회와 만주건국 10주년 기념회를 위하여 일본과 만주국을 찬양하는 만주환상곡을 지었을 뿐 아니라, 1938년에 발표하여 자신의 역작이라며 각지에서 지휘하고 다니던 '에텐라쿠'라는 음악은 일본 천왕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연주되는 곡이다. 자기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 천왕을 칭송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의 교두보인 괴뢰국 만주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만들고, 다른 나라에 일제를 홍보하는 음악 활동으로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인사가 작곡한 노래를 애국가라고 계속 부르는 것이 옳은 일일까.

다른 나라의 국가는 어떨까? 물론 나라마다 역사가 다르니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라와 민족을 배신한 이가 만든 노래를 국가라고 부르는 나라는 없는 듯하다.

미국 국가(성조기여 영원하라, The Star-Spangled Banner)는 시인이자 변호사인 스콧트 키(Francis Scott Key)가 미국-영국 전쟁의 막바지인 1814년, 포로 협상을 위해 떠나는 배 위에서 볼티모어 바닷가에 있는 맥 헨리 요새에서 펄럭이는 성조기를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지은 시에서 비롯된다.

당시는 영국과 미국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시기였는데, 볼티모어 체사피크만에 있던 미국의 요새인 맥 헨리에 영국군이 25시간 폭격을 퍼부었다. 밤낮으로 이어진 영국군의 폭격으로 불타오르는 맥 헨리 요새의 포화 속에 펄럭이고 있는 성조기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스콧트 키가 썼다는 시가 현재 미국 국가의 가사가 됐다.

스콧트 키가 이 시를 쓴 지 117년 뒤인 1931년, 이는 후버 대통령에 의해 정식으로 미국 국가로 지정된다. 미국인들은 성조기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미국 국가의 역사적 유래를 아는 사람이면, 이 노래를 부를 때 자신이 스콧트 키가 되어 맥 헨리 요새에서 펄럭이던 성조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애국을 생각하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1786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이라는 혁명의 가치가 유럽으로 퍼지는 것을 막고 프랑스 혁명을 좌절시키려는 유럽의 왕조국가들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 와중에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가 탄생한다.

원래 라 마르세예즈의 가사와 곡을 지은 사람은 프랑스 군인인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이다. 그는 반혁명 유럽 봉건 왕조세력의 핵심이었던 독일-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라인강 진격을 앞둔 하룻밤 사이에 이 곡을 작사·작곡했다고 한다. 군인이 출전 전날 밤에 만들어서 그런지 원래 제목은 '라인 군의 군가'였다고 한다. 당연히 군가풍이다.

"나아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이여 영광의 날은 왔도다!
폭군에 결연히 맞서서 피 묻은 전쟁의 깃발을 올려라. ......
진격하자, 진격하자! 우리 조국의 목마른 밭이랑에 적들의 더러운 피가 넘쳐 흐르도록!"(프랑스 국가 1절 가사 일부)

프랑스 국가는 가사와 곡조에서 섬뜩할 정도의 기운이 느껴지는 군가풍이다. 이 노래에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가 있고,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지키려는 프랑스인들의 결기가 스며 있다. 너무 센 군가풍의 국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프랑스 국가에는 프랑스를 반혁명세력이나 외세에 팔아넘기려는 매국노가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중국 국가는 중국이 일본 제국주의와 생사를 걸고 싸우던 대일(對日) 전쟁 시기인 1935년, 티엔한(田漢)이 작사하고, 니에얼(?耳)이 작곡한 '의용군 행진곡'이 시초다. 중국 국가는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던 의용군인들이 불렀던 군가가 기원이다. 가사 곳곳에서 중국을 지키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광복 70주년, 애국가 의미 따져볼 때

나라마다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국가를 천편일률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라를 대표하는 노래이고 나라 사랑을 위한 노래라면 가져야 할 기본 자격이 있다.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한 자가 만든 노래를 국가라고 하는 건 모순이다.

법으로 애국가를 '국가'로 지정하진 않았지만, 이미 70년 동안 관행으로 불려온 애국가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현실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은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를 지었다는 윤치호와 안익태가 민족을 얼마만큼 배신했는지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반민족 행위자로 알려진 인사들의 행적을 국민에게 정확하게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말로만 광복 70주년을 외치고, 일제 잔재 청산을 외친다고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버전들이 있었는데 왜 하필 친일파가 지은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 따져볼 일이다. 특히 반민족 행위자들이 만든 노래를 부르는 건 후손으로서 너무 민망하다. 이미 역사학자들, 심지어 음악전문가들도 친일파가 만든 애국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애국가를 작사·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윤치호와 안익태가 친일 반민족행위자인지 아닌지 먼저 따져본 뒤, 그들이 반민족행위자가 맞는다면 애국가에 대한 논의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축하할 자격이 있는 후손이 될 수 있다. 아닌가?
○ 편집ㅣ최유진 기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