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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간 한국인은 왜 강한가] 美 뉴저지州 첫 한인 市의원 된 윤여태씨의 '아버지, 내 아버지'

천하한량 2013. 7. 7. 20:37

매일 동네 청소 'Mr 친절' 아버지… 횡포 부리던 백인 마음도 사로잡아
한국식 人情으로 마음 열고… 오지랖으로 감동시키고
2001년 돌아가신 아버지… 여기 살려면 이곳에 기여하라

미국 뉴저지주(州) 저지시티 시의원 결선투표일인 지난달 11일. 이 도시 '하이츠 선거구'의 무소속 시의원 후보인 윤여태(59·미국 이름 마이클 윤)씨의 선거운동본부에서 결과를 손꼽아 기다리던 지지자들이 오후 8시쯤 환호성을 터뜨렸다. 윤씨가 57%의 표를 얻어 뉴저지의 첫 한인 시의원에 당선되는 순간이었다. 허드슨 강을 사이에 두고 뉴욕 맨해튼과 마주 보고 있는 저지시티는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뉴저지주 제2의 도시다.

윤여태씨는 1979년 미국에 이민한 한국계 사업가이자 정치인이다. 윤씨는 한 달 전 1차 선거에서 1위를 했지만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해 이날 결선 투표를 치렀다. 하이츠 선거구의 유권자는 2만명. 그 중 한국계는 6명밖에 안 된다.

5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쓸 정도로 바쁘다는 윤씨를 지난달 말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피 말리는 두 번의 투표를 거쳐 당선을 확정 지은 순간에 2001년 7월 세상을 뜬 아버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선거 기간에 아버지의 도움을 제가 아직도 받고 있음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미국인과 달리 아버지는 동네의 고장 난 의자만 보면 손수 수리를 했고, 남의 가게 앞도 빗자루로 쓸면서 동네 주민들의 신임을 얻으셨지요. 그런 마음이 한 표, 또 한 표로 바뀌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윤씨는 지난 1일 시의원에 취임했다.


	윤여태 의원
지난 1일 오전 취임선서 직전 저지시티 시의회 의원실에서 윤여태 의원이 웃음을 짓고 있다. 윤 의원은“이 번 선거에서 당선된 것은 물론 나의 미국에서 삶 전체는 아버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 저지시티(뉴저지)=사진작가 윤상혁
◇아르바이트 세 개로 연명…"생존은 쉽지 않더라"

스물다섯 살 청년 윤여태는 1979년 유신 말기 혼란한 국내 상황이 싫었다. '새로운 세상'에 가고 싶어 무작정 미국에 건너갔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 미국에서 생존하기는 녹록지 않았다. 그는 매월 125달러를 내고 냉·난방이 잘 안 되는 뉴욕 브루클린 낡은 벽돌 건물의 원룸에 묵었다. 여름엔 너무 더워 욕조에 찬물과 얼음을 채우고 들어가 앉아 있어야 했고, 한국에선 본 적 없는 거대한 바퀴벌레에 기겁한 적도 많았다.

윤 의원은 미국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밤에 수업하는 브루클린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주중엔 오전 4시에 일어나 잡화점과 과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공부는 밤늦게나 해야 하니 네 시간 이상 잠을 자기가 어려웠죠." 주말엔 생선 가게에서 온종일 일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지하철을 타면 비린내가 심해 사람들이 주변에 앉지 않았다. "얼음이 꽁꽁 얼어 있는 냉동고에서 생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작업이었습니다. 생선 가시가 얼어서 장갑 안으로 파고들어 오면 손톱 밑에 피가 나서 새카맣게 변했어요. 손이 어는데 가시가 박히면 정말 곤란했죠, 하하."

그가 미국에 온 지 1년 만에 부모님도 미국 이민을 결정했다. 한국에서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가 주변의 음해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여러 번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암에 걸렸다. 암을 치료하려면 미국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이 미국에 온 후엔 비교적 집세가 싼 저지시티에 아파트를 구해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사업을 정리하고 그 돈을 미국에 가져왔지만, 물가가 훨씬 비싼 미국에서 생활하기엔 빠듯했다. 윤씨가 대학을 계속 다니겠다고 고집하기는 어려웠다. 돈이 당장 필요했다. 아르바이트 몇 개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공부는 포기하고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미국에 돈 벌려면 역시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윤씨는 결국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임대료가 비싼 맨해튼은 엄두를 못 냈고, 대신 저지시티에 가게를 물색했지만 마땅한 가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엔 저지시티 거주자의 90% 이상이 아일랜드계 또는 이탈리아계 백인이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해 돈이 있는데도 부동산 주인이 건물을 팔거나 세를 주지 않았다.

번 번이 퇴짜를 맞던 윤씨는 1981년 뉴욕타임스에 실린 작은 부동산 광고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저지시티의 가장 중심가인 센트럴애브뉴 사거리에 있는 가게를 팔겠다는 광고였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다짜고짜 아버지와 함께 소유주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 부자(父子)는 한국의 독재 권력을 피해 미국에 왔습니다. 어머니는 암에 걸려 치료비가 필요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손짓 발짓해가며 설명하는 윤씨 부자를 본 집주인은 선뜻 "오케이"라고 했다. "광고를 낸 가게 주인이 나치 수용소에서 탈출한 유대인이었던 거예요. 고생했던 자신의 이민 초기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면서, 가게 권리금까지 반값으로 깎아줬습니다."


	윤여태 의원의 아버지 윤석건(왼쪽·2001년 작고)씨
윤 의원의 아버지 윤석건(왼쪽·2001년 작고)씨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손길을 뿌리치는 법이 없었다. 1998년 11월 윤석건씨가 6·25 참전용사기념비 건립 헌금으로 5000달러(570만원)를 내고 있는 모습. / 윤여태 의원 제공
◇'한국식 오지랖' 저지시티의 마음을 사다

윤씨 부자는 작은 잡화상에 '가든 스테이트 뉴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신문과 잡지, 복권 등을 팔았다. 가게는 언제나 그 길에서 가장 일찍 문을 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매일 아침 빗자루를 들고 길을 청소했다. '돈 버는 지역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하던 아버지의 아이디어였다. 한국 여느 시골의 구멍가게 앞에서는 흔히 볼 수 있을 만한 모습이지만, 미국인에겐 낯선 풍경이었다. 미국인은 집 앞의 낙엽을 쓸더라도 칼로 자른 듯 자신의 집 앞만 쓴다. "여름엔 오전 6시, 겨울에도 7시면 가게 문을 열고 온 거리를 다 쓸었어요. 한참 쓸다 보면 인근 상인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해요. 아버지는 그러면 빗자루질을 하다 말고 고개를 숙여 한국식으로 인사를 했어요. 머쓱하게 쳐다보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아버지처럼,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기 시작했죠."

아버지는 이웃의 어려운 일에 발벗고 나섰다. '한국식 오지랖'이었다. 1980년대 센트럴애브뉴 주변엔 이탈리아·아일랜드계가 모여 살았고 인도·아랍·중국계 등 다양한 소수 인종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윤 의원은 "새로 온 사람들은 거의 생활이 어려웠다. 이 동네 치안은 무척 좋지 않았고 인종차별도 심했다"고 말했다. 백인들이 몰려다니며 유색인종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가는 식의 횡포를 부리는 일도 잦았다. "소수 인종 사람들은 차별을 받으면서도 말과 문화가 다르다 보니까 선뜻 서로 도울 생각을 못했어요. 그때 나선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죠."

아버지 윤씨는 걸핏하면 부서지는 길거리 벤치를 손수 고쳤다. 철물점에서 부품을 사다가 뚝딱 고치면 망가지기 전보다 훨씬 멀끔해졌다. 이웃 가게에 들렀다가 문고리가 느슨한 것만 봐도 연장을 들고 찾아가 조여놓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미스터 윤, 왜 이렇게 친절해요"라고 종종 물었다. '기브 앤 테이크'에 익숙한 미국 사람들에겐 윤씨의 행동이 거의 기행(奇行)으로 여겨졌다. "아버지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원래 예의가 바르고 항상 이웃을 생각한다'고 웃으며 답하셨어요. 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셨는데 제가 함부로 살 수 있었겠습니까, 하하."


	저지시티 시의회에서 윤여태(맨 왼쪽)씨가 오른손을 올리고 부인과 함께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지난 1일 낮 12시 30분쯤 저지시티 시의회에서 윤여태(맨 왼쪽)씨가 오른손을 올리고 부인과 함께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뒤에서 두 아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저지시티(뉴저지)=사진작가 윤상혁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이곳에 기여해야 한다"

인종차별이 잦아들지 않던 어느 날 '닷 버스터(Dot Buster)' 사건이 일어났다. 인도 여성들이 미간(眉間)에 붙이는 점을 날려버리겠다는 뜻의 '닷 버스터'는 1980년대 저지시티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유색인종 차별주의자 집단이었다. 아버지는 늘 하던 대로 이들에게 피해를 본 가게에도 찾아가 부서진 식탁과 의자를 고쳐주고 청소를 도왔다.

'닷 버스터'의 폭력성은 점점 심해져 1987년 9월, 대낮에 인도계 의사 두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에게 폭행당해 한 사람이 죽고 다른 사람은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 당시 사건을 맡은 지역 경찰은 단순 폭행치사로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 경찰서장이 "이 사건은 인종차별이 아닌 사고이며 이런 일은 이민자가 겪어야 할 과정이다"라고 발언해 논란이 커졌다. 윤씨 부자가 팔을 걷어붙였다. 가게를 하며 얼굴을 익힌 소수인종 사람들을 대상으로 서명 운동을 하고 시위도 조직했다. 폭행치사가 아니라 증오범죄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지였다. 미국에선 증오범죄로 취급될 경우 일반 범죄보다 형량이 최대 25배까지 오른다. 3000여명이 동참해 재조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결국 재조사가 이뤄졌다.

윤 의원은 "저보다 아버지가 먼저 나섰고, 아버지는 이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소수인종들, 특히 인도계 사람들이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괜히 나섰다가 린치를 당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웬 동양 사람이 총대를 메니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아버지는 한국인의 정(情)을 내세웠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거였죠." 그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도계 미국인들은 이번 시의원 선거에서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해 윤씨의 당선을 도왔다.

아버지는 언제나 "여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동네에서 기여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돈은 못사는 동네에서 험하게 벌고, 백인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 거주하는 식의 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윤씨 가족은 가게 위층에서 살면서 동네에 녹아들어 갔다. 30년 동안 한곳에서 살면서 장사를 하고 남을 돕는 사이 윤 의원은 동네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터줏대감'이 된 셈이다. 윤 의원은 인종차별과 맞서 싸운 경험을 토대로 저지시티 한·흑(韓·黑)연대위원회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해 인맥을 넓혀갔고 1993년부터 9년 동안은 저지시티 부시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윤씨의 사회 활동이 확대하는 사이 가게는 주로 부인이 맡아서 운영했다.

아버지 윤석건씨는 77세였던 2001년 세상을 떴다. 윤석건씨가 세상을 뜨고 나서 그의 도움을 받은 지역 주민들은 시 정부에 특별한 건의를 했다. 고인(故人)이 온정을 베풀었던 거리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바꾸자는 청원이었다. 시의회는 이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가든 스테이트 뉴스' 앞 사거리엔 2001년 '윤석건 사거리(Sokkon Yun Plaza)'란 이름이 붙었다.

윤 의원은 인터뷰하는 동안 "미국에서의 내 삶은 부친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인생의 가치는 작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일이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네 어르신들이 늘 강조하는 말씀이었지만, 정작 미국에 오니 아버지가 이야기하던 이런 가치들이 더 소중히 여겨졌습니다. 요즘은 특히 장사를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동네를 쓸자고 빗자루를 건네며 하셨던 말씀이 많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해보자'… 오늘의 저는 아버지의 그 말씀에서부터 시작된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