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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 걱정과 함께 살아가기

천하한량 2013. 4. 4. 14:33

2013년 4월 1일 (월)
근심 걱정과 함께 살아가기
  근 심 걱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겉으로는 아무리 평온하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속에서는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산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연에 내던져져서 스스로를 앞으로 던져가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쾌락은 불쾌함이 멎은 순간 에 잠깐 누리는 즐거움이고, 행복은 불행이 유예된 순간 잠시 들른 반가운 손님이다. 고통과 불쾌와 불행과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실은 삶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늘 안락하다면, 늘 행복하다면, 늘 기쁘다면 그것이 어찌 안락이겠으며, 행복이겠으며, 기쁨이겠는가! 웃음은 오래 웃을 수 없지만, 울음은 오랫동안 울 수 있다. 사람은 엄마 품을 떠나 제 손으로 밥을 주워 먹을 수 있는 만큼만 크면 벌써 불쾌함과 불편함 속에서 유아기의 안온함과 편안함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한다. 삶은 근심 걱정의 연속이다. 근심 걱정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근심이 사라지면 또 다른 근심이 생기고, 한 가지 걱정이 해결되면 또 다른 걱정이 생긴다. 그러기에 근심 걱정은 아예 뿌리째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근심 걱정을 풀어내는 슬기를 스스로 터득할 일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매우 가난하였는데 늘그막에 구산 아래에 집을 한 채 빌렸다. 집 둘레는 휑뎅그렁하여 바람과 햇빛을 가릴 수도 없었다. 손님이 오면 늘 텃밭에 앉아서 맞았다. 10년을 경영하여 초당 한 채를 얽었는데 또 한 해가 가고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 초당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면에 봉우리가 바싹 다가 있다. 초당에는 빈 땅이 없어서 대나 나무나 꽃 따위를 심지 않았으나 국화 몇 포기가 있어서 때가 되면 피었다. 굴뚝을 남창(南囱)이라 하고 뜰을 면가(眄柯)라 하고 문을 상관(常關)이라 불렀다. 초당 동쪽에 나지막한 울타리가 있었는데 역시 동리(東籬)라 하였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합하여 초당의 이름을 소우(消憂)라 하였는데 모두 도연명의 말을 따온 것이다. 근심은 마음의 병인데 풀어서 없어지게 하여 즐겁게 된다면 천지 만물이 모두 나에게는 즐거운 것이 된다. 어떤 손님이 물었다. “사모할 만한 옛 성현이 한둘이 아닌데 그대는 초당의 창, 문, 뜰, 울타리를 모두 도연명의 말을 따와서 이름 붙였네. 그대는 어째서 오로지 도연명만 별나게 사모하는가?” 내가 말했다. “사모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그와 같았을 뿐이네. 내가 가난한 것이 도연명과 같고, 초당에 책이 있는 것이 도연명과 같고, 남쪽에 창이 있고 동쪽에 울타리가 있는 것이 도연명과 같고, 문이 늘 잠겨 있어서 쓸쓸한 것이 도연명과 같네. 그래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지 구차하게 사모하는 것이 아니네.” “그대의 말은 그럴듯하네. 도연명은 시에서 ‘고[琴]와 책을 즐기며 근심을 씻는다.’고 하였는데, 그대의 초당에는 책은 있으나 고가 없으니 어째서인가?” “도연명에게는 무현금(無絃琴)이 있고 나에게는 무형금(無形琴)이 있으니 어찌 고가 없다고 하는가?” 손님이 웃고서 갔다.

余自少貧甚, 晩而賃屋於龜山之下. 環堵蕭然, 不蔽風日. 客至則常坐於塲圃. 十年經營, 搆一草堂, 又一年而成焉. 厥位面陽, 有峰(雨/隻)峙於前. 堂無隙地, 無竹樹花卉之植, 只有菊花數叢, 時至而發. 囱曰南囱, 庭曰眄柯, 門曰常關. 堂之東有短籬, 亦曰東籬. 合而名之以堂曰消憂, 皆取淵明語也. 憂者心之病也, 消之使無, 以至於樂, 則天地萬物, 皆吾之樂也. 於是客有問者曰, 古之聖贒, 可慕者非一, 而子之堂若囱若門, 若庭若籬, 皆取陶語而名之. 子何獨偏慕於陶也. 余曰非慕之, 偶似之也. 吾之貧似陶也, 堂有書似陶也, 南有囱東有籬似陶也, 門常關而寂然者似陶也. 以故名之, 非苟於慕也. 客曰子之言然矣. 淵明之辭曰樂琴書而消憂, 子之堂有書而無琴何也. 余曰淵明有無絃琴, 余則有無形琴, 何謂無琴. 客笑而去.
 
- 김윤안(金允安, 1560~1622), 「소우당기(消憂堂記)」, 『동리선생문집(東籬先生文集)』권4

 

                    ▶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韓國의 美』에서 인용

  이 글을 쓴 김윤안은 자가 이정(而精)이고, 호가 동리(東籬)이다. 네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예안에 갔다가 퇴계 이황 선생을 뵈었는데 이황이 기특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열 살 때 원대한 기상을 드러내는 시를 지었다고 하며 박승임(朴承任), 류운룡, 류성룡에게서 배우고 김성일에게도 학문을 물었다. 류성룡에게서 많이 배웠기 때문에 류성룡의 문하로 분류된다. 김윤안은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의식도 강하여 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에 참여하여 김해(金垓)의 막하에서 문서 수발을 도맡았다고 한다. 영남 유생들이 이언적(李彦迪)을 변호하고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 운동을 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선조 후반과 광해군 때 관직에 나아가기도 하였지만, 대구 부사를 마지막으로 향리로 돌아와 소우당을 짓고 칩거하였다.

  김윤안의 초당을 이루는 여러 시설의 이름은 주로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초당을 이루는 창, 뜨락, 문 이름은 모두 「귀거래사」의 구절에서 유래한다. 창이 남창(南囱)인 것은, ‘남쪽 창[囱]에 기대어 후련해하며 무릎 뻗을 만한 방에서도 편안함을 안다.’는 구절에서, 뜰이 면가(眄柯)인 것은 ‘술병과 잔을 끌어당겨 혼자서 마시며 뜰의 나뭇가지[柯]를 흘끗 보고서[眄] 기쁜 얼굴을 짓는다.’는 구절에서, 문이 상관(常關)인 것은 ‘동산은 날마다 꼴을 이루어가고 문은 달렸지만 늘[常] 닫혀 있다[關].’는 구절에서 나왔다. 울타리가 동리(東籬)인 것은 ‘음주(飮酒)’라고도 하는 잡시(雜詩)의 한 수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東籬] 밑에서 국화꽃을 꺾어들고 그윽이 남산을 본다.’는 구절에서 나왔다. 그리고 당호인 소우(消憂)도 「귀거래사」의 ‘친척과 정담을 나누며 기뻐하고 고[琴]와 책을 즐기면서 근심[憂]을 푼다[消].’는 구절에서 따왔다.

  초당을 아예 도연명의 시어(詩語)로 도배하다시피 한 것은 정말 손님의 지적대로 하고많은 성현들 가운데 왜 도연명만 그렇게 편애하느냐고 지적을 받을 만하다. 조선 시대 학자들 가운데 도연명을 사모하고 그의 시 세계에 탐닉하며 그의 시풍을 본받으려 한 사람으로는 퇴계 이황이 으뜸갈 것이다. 이황은 도연명의 시를 ‘담담하고 깨끗하며, 한적하고 아취가 있어서 구절과 운율에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않은 듯하고, 말을 꾸민 것은 자연스러우며, 시의 뜻은 순박하고 고풍스러워서 그의 시를 읽고 맛을 보면 속세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만물 가운데 홀로 초탈하게 서 있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이황의 시도 고고한 도학의 천리(天理)를 평이한 자연의 시어로 소박하고 담담하게 그려낸 시가 많다. 김윤안은 류성룡을 통해 이황의 학맥에 이어진다. 그래서 김윤안도 은연중에 이황을 닮아 도연명을 편애했던 것일까?

  이황이나 김윤안이 왜 도연명을 그리도 사모했을까? 도연명은 「귀거래사」라는 사(辭) 한 편으로 동아시아 지식인의 지향을 보여주었다. 과거 동아시아 유교 사회의 지식인은 행도수교(行道垂敎)를 삶의 표어로 삼았으며, 출처진퇴(出處進退)를 잘해야 떳떳한 지식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떳떳한 지식인은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갈고 닦아서 과거를 보아 사회에 진출하여 공직을 맡아서 자기가 갈고 닦은 학식과 덕행을 실천하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쓰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고 도의가 쇠퇴하면 벼슬과 출세에 연연하지 않고 단호히 물러 나와 후세를 교육함으로써 미래 사회에 희망을 두었다. 벼슬에 나아갈 만하면 나아가서 최선을 다하고 온갖 협잡과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자기 힘으로는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없고 자기 지조조차도 지키기 어려울 상황이 되면 미련 없이 물러 나와 자기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도연명은 이런 출처 진퇴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작은 지역의 수령이라는 알량한 공직에서조차 자기 지조를 굽혀야만 처신할 수 있고 자기 양심을 무디게 해야만 출세하고 자기 품격을 헐어버려야만 붙어살 수 있는 관료사회의 현실을 못 견뎌 하고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자급자족하며 자연에 순응하며 일생을 보냄으로써 멋있는 삶을 살았다.

  사실 지식인에게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라도 우호적이지 않다. 어쩌면 지식인은 숙명적으로 시대와 불화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지식인은 자기 근심을 근심으로 삼지 않고 시대의 근심을 근심으로 삼아야 하며, 자기 걱정을 걱정으로 삼지 않고 사회의 걱정을 걱정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근심과 걱정은 작은 근심 걱정이다. 사회와 시대의 근심과 걱정은 큰 근심 걱정이다. 지식인은 큰 근심과 걱정을 자기의 근심 걱정으로 삼아야 하므로 자기 일신의 불편함은 웃음으로도 넘길 수 있다. 김윤안이 소우당에 설치한 여러 시설의 이름에는 도연명을 끌어들여 실은 자기의 청빈한 삶을 희화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것을 즐기려는 마음의 자세가 나타나 있다. 그리하여 무현금과 무형금의 대비는 압권이다. 골계미가 넘친다. 있음은 한정된 있음이지만 없음은 한정되지 않은 있음이다. 이런 삶의 크기를 지니면 시대와 사회의 근심 걱정은 나서서 하지만 자기의 근심과 걱정은 웃어넘길 수 있다. 그러니 저마다 무형금을 하나씩 마련하여 두고 틈틈이 근심 걱정을 실어 무형금을 타면서 삶을 즐길 일이다.


  

  
김태완 글쓴이 : 김태완
  •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