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자료실 ▒

소설가 박경수선생과 고 장준하선생

천하한량 2012. 12. 17. 18:55

[소설가 박경수]

소설가. 충남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 출생. 한산초등학교를 졸업, 독학(獨學)으로 초등학교 교원자격시험과 중학교 교사자격시험에 합격, 향리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1955년 〈사상계(思想界)〉에 단편 《그들이》가 입선, 그후 서울로 옮겨와 〈사상계(思想界)》의 편집직원을 거쳐 건설부 공보관실에서 공무원생활을 했다. 초기에는 농촌의 생활상과 애정윤리(愛情倫理)를 추구하는 단편소설들만 써오다가 1969년 〈신동아(新東亞)〉에 장편 《동토(凍土)》를 발표하면서 작품세계를 확대, 주로 생활계층의 차이에서 오는 빈부(貧富)의 갈등과 충돌 등 심각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들을 다뤄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박한 사회적 문제의 주제에도 불구하고, 문제성의 원인 규명이나 상황 관찰에 있어 굳이 이념적 편견이나 정치적 재단(裁斷)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데, 이 점이 본격적인 농민소설이나 사회소설과 구별되는 한계성으로 여겨진다. 특히 가난한 농촌과 가난한 사람들의 정감(情感)에 대한 무한한 향수는 작품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델리킷한 감각에 유려(流麗)한 문장은 작품의 문학적 향기를 북돋아 주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제8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단편 《이빨과 발톱》(59), 《의젓한 초상(肖像)》(60), 《하자(瑕疵)》(60), 《우울한 마을》(63), 《속(續) 애국자》(64), 《화려한 귀성(歸省)》(64), 《어느 충직한 짐승 이야기》(72), 《가나안 정신사관(精神士官)학교》(72) 등이 있고 장편으로는 《흔들리는 산하(山河)》(71), 《청산별곡(靑山別曲)》(71), 《종(種)이 울리는 새벽》(72) 등이 있다.


갑자기 무슨 소설가 이야기냐고? 그는 장준하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장준하의 직원이었다. 그는 장준하의 일상을 봤고 그의 열정을 봤다고 했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쓴다고 했다. 장준하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 기억이 났다.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 선생도 박경수 선생을 싫어했다. 박경수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충남 서천의 진짜 찾기 힘든 곳에서 살고 있었다. 연락처도 무척 힘들게 알아냈다. 결례를 하기 싫어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사정 설명을 했음에도 반욕설 가까운 거절을 당했다. 난 더 접촉하지 않았다. 다만 내 휴대폰 번호를 따박또박 말씀드리고, 생각 바뀌시면 연락 주세요 라는 한 마디만 남겼다. 이틀 뒤 전화가 왔다. 그래서 마지막 일정으로 넣어 두었다. 그의 음성은 낮고 질겼다. 확실히 그랬다. 많은 아이들이 졸았다. 그는 신경쓰지 않고 낮고 질긴 음성으로 꾸역꾸역 할 말을 다 했다. 







그의 방에는 장준하가 걸려 있었다. 꽤 긴 시간 그와 나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아이들이 거진 다 쓰러졌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장준하 선생, 장준하 선생님, 으로 시작되는 문장들을 아직도 읊조렸다. 그러면서, 우리 장 선생님 생각해줘서 고맙네 라고 말했다. 그의 벽에는 장준하 선생님들이 떨어지지도 너덜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쓰는 것'으로 장준하 선생을 살리겠다고 말했다.







저 많은 아이들을 이틀 동안 정신없이 끌고 다닐 때 내가 했던 말은,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분들이 있다." 
한 마디였다.

그런데 오히려 고맙다는 말만 듣고 왔다.

다들 어리둥절한데 조금은 슬프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