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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왜소해지는 노인들] “먹고살기 위해 일하제”… “하숙생처럼 살아요”

천하한량 2011. 12. 8. 20:27

'100세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원은 2020년이면 우리 사회가 사실상 100세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10년도 채 안 남았다. 이미 '50대는 청년'이라는 말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르바이트로 뛰고 있는 60∼70대 노인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오래 산다'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반갑지만은 않다. 우리 국민 10명 중 4명은 '100세 시대가 축복이 아니다'고 받아들인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노인은 건강도, 돈도, 즐거움도 누리기가 쉽지 않은 우리 사회 현실 때문이다. 먹고살아야 할 '삶의 시계'가 길어지면서 뭐라도 하기 위해 일터로 내몰리는 노인들은 과연 행복할까. 100세 시대를 앞둔 2011년 대한민국 노인의 삶을 짚어본다.

지난달 25일 오후 4시20분 서울 지하철1호선 방학역. 회색빛 점퍼를 입고 오른쪽 어깨에 검은색 작은 가방을 멘 김정선(가명·71)씨가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눌러쓴 모자 사이로 흰머리가 드러났고, 손등에는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의정부로 가는 열차에 타자 노약자석에 앉았던 60대 할머니가 일어섰다. 그는 자연스럽게 양보를 받은 자리에 앉아 입을 뗐다. "한창땐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열차는 어느새 목적지인 가능역에 도착했다. 찬 바람이 몰아치는 역사 밖으로 나자가 그는 옷깃을 여몄다. 10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한 종합병원. 김씨는 능숙한 솜씨로 간호사에게 검은 봉지를 건네받았다.

그가 하는 일은 치기공소에서 만든 인조치아를 병원에 전달해주고, 새로 제작할 인조치아 모형을 받아오는 일종의 '택배' 업무다. 하루 일과는 오전 7시 서울 방학동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 차례씩 지하철을 이용해 서울시내 치과 5∼6곳을 오간다. 일거리가 많은 날엔 13군데까지 돌아다니기도 한다. 하루에 3∼4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내고 15㎞ 정도를 걷는다.

이렇게 일해 손에 쥐는 돈은 한달에 50만원 정도. 적다면 적은 돈이지만 빠듯한 노후 생활에 이런 일거리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긴다. 지금 하는 일도 지난 4월 일자리를 소개해주는 구청 전단지를 보고 어렵사리 구했다.

경찰 공무원으로 30년을 일하고 1998년 정년퇴직한 김씨는 10년 동안 '하숙생'처럼 살았다. 이렇다 할 수입이 없이 매달 연금으로 나오는 160만원이 아내에게 주는 생활비의 전부였다. 소득이 없는 가장은 더 이상 가장이 아니었다. 한창 일할 때 바쁜 경찰 업무 특성 때문에 멀기만 했던 가족은 퇴직을 하면서 더 멀어졌다. 아내와 한 집에 살고 있지만 식사도 따로 차려 먹고 빨래도 스스로 했다. 그는 "10년을 그렇게 살다보니 이제는 배추김치 담그는 것 빼고 웬만한 반찬은 다 할 줄 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2008년 일자리를 찾아 재활원이나 가방 수리점 등을 두드려봤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데 매번 나이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그해 3월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55세 넘어가면 안 받는다"는 현장소장에게 사정을 하며 매달렸다. 그는 428일 동안 공사장에서 건설 자재를 정리하는 일을 도맡았다. 일하는 동안에는 시간도 금새 흘렀고, 마냥 땀 흘리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어느날 허리에 통증이 왔다. 너무 몸을 혹사한 탓이었다. 막노동 일을 그만두고 카드 배달 일을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허리 통증에 쉽지 않았다. 그는 "나이 먹고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진 않지만 퇴직한 늙은이들 먹여 살리려고 정부가 일일이 신경 쓸 수는 없지 않느냐"며 "앞으로 여생을 꾸리려면 스스로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멀어져 갔다. 10개 정도 친목 모임에 가입해 활동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정리하고 기껏해야 한 달에 2번 정도 모임에 나간다. 그렇게 모임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대부분 '내일은 또 뭐하나' 하는 한 숨 섞인 대화만 오간다.

두 아들은 결혼해 따로 살림을 차린 뒤에는 전화 한통 없었다. "자식들이 어렸을 땐 맹자 어머니처럼 애들을 책상머리에 앉혀놓고 직접 공부도 가르치고 산에도 데리고 다녔는데…."

오후 5시, 퇴근시간이 됐다. 사무실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반갑지 않아서다. 혼자 저녁을 차려먹고 나면 책 읽기로 시간을 보낸다. 작가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세상과 소통하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책이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