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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3호 발굴 지휘… '난파선을 건져올리는 사나이' 문환석씨

천하한량 2011. 10. 24. 19:09

“바다에 ‘배들의 무덤’ 있어… 건져 올린 난파선 모두 高麗의 배”
주꾸미가 움켜쥔 접시 파편 청자 2만5000점(187억) 인양… 최고 성과 거두고 징계받아
해군이 맡다 공무원 직접 잠수 지금껏 18번 발굴, 11번 참여… 태안 앞바다는 '難行梁' 불려

충남 태안군 신진도(島)에서 배를 탔다. 5분쯤 나왔을 때, 이미 바다는 배를 들어올렸다 놓았다 했다.

" 바다 밑 갯벌에 박힌 유물을 파내야 할 때 방법이 없자, '호미를 들고 가자' 했지요. 갯벌이 워낙 단단해 호미가 휘어졌어요. 수중발굴의 '수'자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알았으면 안 맡았을 겁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수중유물 발굴 권한을 가진 기관은 해양문화재연구소뿐입니다. 우리가 손 놓으면 수중발굴이 없습니다. 안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문환석(50)씨는 배 위에서 잠수복으로 갈아입었다. 명색이 학예직 공무원으로 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장인데, 외모와 언행으론 입증하기 어려웠다. 그는 수중유물 발굴의 현장지휘관이다.

지금껏 국내에서는 모두 18건의 수중발굴이 이뤄졌다. 이 중 11건을 그의 팀이 해냈다. 얼마 전 '고려 삼별초 실체 보여주는 유물 인양'으로 매스컴에 보도된 '마도 3호선'도 그렇다.

"750 년 전 전남 여수에서 강화도의 권력 실세 앞으로 화물을 싣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이 아래에서 침몰했습니다. 도자기, 사슴뿔, 말린 상어고기, 홍합젓, 멸치젓, 개고기포, 곡물, 그 속에 숨어 들어갔던 쥐의 뼈가 나왔어요. 놋숟가락 10개와 차(車)·포(包)를 새긴 조약돌 장기도 발견됐어요."

문환석씨는“바다 밑 단단한 갯벌에서 유물을 파내기 위해 처음에는 호미를 들고 갔다”고 말했다. /태안 앞바다=최보식 선임기자

―어떻게 바다 속에서 오랜 세월 남아있었을까요?

"갯벌이 진공 포장처럼 배의 유물들을 보존시킨 겁니다. 갯벌에 안 묻혔다면 부식되고 사라졌겠죠. 바로 태안 앞바다가 '배들의 무덤'이었습니다."

―배가 집중적으로 침몰하는 지점이 있었다는 뜻인가요?

" 당시 뱃사람은 여길 '난행량(難行梁·다니기 힘든 바다)'으로 불렀어요. 물살이 세고 해무(海霧)가 짙어요. 배들의 난파는 참극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 지점이 유물 창고가 됐습니다. 그 시절의 생활상을 그대로 담은 '타임캡슐'인 것이죠."

―어떻게 이런 난파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3 년 전 한 어민이 접시 파편을 신고해와 수중 탐사에 들어갔지요. 잠수사가 '과장님, 바다 밑에 묘비가 있어요' 했습니다. '바다에 무슨 놈의 묘비냐'. 그게 배의 닻돌(앵커)이었지요. 수색을 해서 닻돌 65개를 건져올렸습니다. 선체 앞뒤로 닻돌 한 개씩 장착했으니 33척이 난파한 셈이지요. 아마 수백 척이 빠져 있을 겁니다."

―당시 배들은 왜 사고 다발 지점을 우회하지 않았을까요?

" 먼바다로 나가서 돌아오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대부분 육지가 보이는 항해를 했죠. 고려와 조선 초기에 태안반도에 운하(運河)를 파려고 했던 기록이 나옵니다. 위험한 뱃길을 피해 운하로 당진항에 들어가려는 것인데 이뤄지진 않았어요."

그는 1986년 학예공무원으로 들어갔다.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1976년) 유물을 보존하는 업무를 처음 맡았다. 도자기 2만여 점과 동전 28t 등 유물이 대량 쏟아져 세상이 떠들썩해진 뒤였다.

" 그 배는 원나라에서 일본으로 가던 화물선이었지요. 엄청난 보물이 인양되자, 중국 정부가 '향후 우리 영해에서 침몰한 외국배는 물론 타국 영해에서 침몰한 중국배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갖겠다'고 선언했어요. 당시 화물 주인(貨主)은 두 명의 일본인이었습니다만. 신안 유물선이 국내 수중발굴의 문을 연 셈이지요."

―그 뒤로 수중발굴 성과를 보면 모두 고려 중기의 선박이었습니다.

" 정말 신기한 노릇입니다. 수중유물은 고려 초기 청자부터 조선 말기 백자까지 나와요. 하지만 난파선은 통일신라나 조선시대 것은 없고, 하나같이 고려 중기 것뿐입니다. 이번에 인양된 '마도 3호선(길이 12m×폭 8m)'은 지금껏 나온 고려 선체 중에서 가장 양호한 편입니다."

―바다밑 선체를 어떻게 들어올립니까?

"선체 목재는 물을 머금고 있어 굉장히 무겁습니다. 잠수사들이 공기주머니를 목재 양쪽에 매달아 들어올립니다. 수면 가까이 올라오면 기중기를 쓰지요. 선체를 복원하려면 10년쯤 걸립니다. 목재는 염분을 빼기 위해 민물에 3년, 약품을 처리해서 5년을 담그고, 다시 건조 2년을 거쳐야 하니까요."

―그런데 거북선은 영영 못 찾을까요?

" 임진왜란 때 원균이 칠천포에서 패전해 거북선 등 98척이 난파한 기록이 나오지만 한때 해군이 그렇게 뒤졌는데도 성과가 없어요. 국정감사 때마다 '왜 거북선을 못 찾느냐'고 합니다. 이번 발굴이 마무리되면 남해안에서 거북선을 찾아야 할 형편입니다."

그가 수중발굴을 책임진 것은 2002년부터다. 비안도 앞바다에 2차 조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해군의 협조를 구했다.

" 당시 '연평해전' 뒤라 침몰한 고속정 인양 작업을 할 때였어요. 해군 측은 '지금 그럴 여력이 없지만 앞으로도 이런 전화를 다시 받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민망한 얘기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수중발굴은 해군에 의지했습니다. 명색이 연구원인 우리는 바다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고 지상에서 인양한 유물을 씻고 분류 정리하는 일을 했어요."

―그 뒤로 공무원들이 직접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는 스토리이군요.

" 대신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직접 할 도리밖에 없었죠. 그때서야 잠수복·산소통·수중카메라 등 장비를 구입했습니다. 민간잠수사도 뽑았죠. 하지만 이들만 바다 속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지요. 우리는 관리한답시고 배 위에만 있고, 이러면 일이 안 됩니다. 직원들을 설득해 잠수교육을 받게 했어요. '내가 잠수하려고 공무원을 지원했느냐'며 불평이 있었지요."

―본인이 먼저 들어갔습니까?

"물론 저도 바다 속 16m까지 들어갔어요. 비안도 근처는 조류가 세요. 가만히 있어도 1분 안에 100m 이상 떠내려갑니다. 물이 흐려 앞도 잘 안 보였어요."

―통상 어디서 단서를 얻어 수중발굴에 들어갑니까?

"잠수해서 어패류를 채취할 때 뭔가 보이거나, 그물에 그릇 조각이 걸려오면 어민이 신고를 해옵니다."

―음파탐지기 같은 장비로는 알 수 없습니까?

"유물들이 대부분 목재나 도자기 같은 비금속류라서. 첨단장비가 동원돼도 결국 우리 직원이 들어가 육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현장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도면에 직접 기록합니다."

―바다 속에서 기록을 한다고요?

"육지에서처럼 바다 속에서도 됩니다. 수중에 사용할 수 있는 기름종이를 만들었지요. 처음 호미질을 하다가 제토(除土)장비도 자체 개발했으니까요."

―발굴은 일년 내내 합니까?

"5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합니다. 기온이 10도로 내려가면 어려워요. 올해 발굴은 24일(월요일)로 끝납니다."

인터뷰 자리에는 초기부터 잠수조사를 해온 양순석 연구사, 마도 3호 발굴 현장을 책임지고 있는 신종국 연구관도 함께했다.

―수중발굴과에서 일하는 것은 본인의 선택입니까?

" 그냥 발령받고 오는 겁니다. 여기 신종국 연구관도 발령받고 사흘 만에 잠수했어요. 배 타고 나와서 '안으로 한번 들어가보라'고 제가 말했지요. 다행히 자신의 적성과 맞았어요. 자기가 좋아서 안 하면 이런 생고생이 없습니다. 수중발굴이 시작되면 외딴섬에서 처자식과 떨어져 지내지…. 열흘에 한 번꼴로 집에 돌아가면 아내와 자식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데 저 혼자만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바다 밑 갯벌에 묻힌 유물을 조사하는 중.

―무엇보다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이지요.

"잠수 사고는 바로 죽음입니다. 깊은 바다에서 30분 이상 잠수하면 신체에 무리가 옵니다. 일하는 욕심에 통상 더 머물게 돼요. 산소가 바닥이 나서 급히 올라오면 기압차로 위험해집니다. 서서히 감압(減壓)하면서 올라와야 합니다.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면 한 시간 이상 쉰 뒤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잠수를 많이 하면 체내에 질소가 쌓여 나중에 고생하죠."

그가 해온 수중발굴의 꽃은 2007년 태안 대섬 앞바다의 '보물선' 인양이었다. 고려청자 2만5000여점이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그 도자기 더미에 깔려 죽은 사람의 인골(人骨)까지 나왔다. 워낙 많이 쏟아져 대접은 30만원, 접시는 10만원으로 일괄 계산하니 187억원이 됐다.

"시작은 한 어민의 그물에 걸린 주꾸미였어요. 그 주꾸미가 청자 파편(破片)을 움켜쥐고 있었던 거죠. 이런 '노다지'가 될 줄은 몰랐지요."

―신고한 어민에게는 얼마나 보상이 돌아갔습니까?

"당시 최고보상금 2000만원이 지급됐지요. 세금을 떼고서. '좀 너무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뒤 규정을 바꿔 최고보상금을 1억원으로 올렸습니다."

―발굴팀에는 보너스로 청자(靑磁) 한 점씩 돌아갔겠지요(웃음).

"… 경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발굴 작업 동안 우리가 고용한 잠수사가 몰래 유물들을 바다 밑에 숨겨뒀어요. 바다 아래 3m만 들어가도 안 보입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요. 발굴이 끝나고 일주일 뒤 다시 거기에 들어가 유물들을 들고 나온 겁니다. 22억원에 팔려다가 체포됐지요. 현장책임자로 경찰서에 불려갔어요. 제게 진술서를 쓰라고 하더군요."

―내부 공모자로 의심했던 모양이군요.

" 내 마음의 아픔은 모르고…. '나도 피해자인데 왜 진술서를 써야 하느냐'고 하니, '그럼 문화재청장을 불러 쓰라고 할까' 겁을 줘요. 그래서 별수 없이 썼어요. 이 고생 이 위험을 무릅썼지만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구나. 그 뒤 관리책임으로 경고를 받았지요."

―잠수사 문제는 또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사건 뒤로 잠수복 머리에 수중카메라와 마이크를 달았어요. 바다 밑에서 작업하는 것을 바깥에서도 다 볼 수 있습니다. 잠수사 선발도 특수부대 경력이 있는 국가유공자 위주로 했어요."

―누구라도 '배들의 무덤'에 몰래 잠수해 유물을 인양할 수 있지 않나요?

"발굴을 안 할 때면 경비정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는 배를 정박시켜 잠수하기만 해도 신고가 들어옵니다."

―최고의 발굴을 하고서 표창이 아닌 징계를 받았으니, '이제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까?

" 그때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감사원의 특별감사를 받으면서 잠수수당과 승선수당이 없다는 게 지적됐어요. 매달 잠수수당 15만원, 승선수당은 2만원이 책정된 거죠. 비록 감사를 받았지만 후배들에게 보탬이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지 그런 수당도 없이 일해온 겁니까?

"그런 건 몰랐고,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한 거죠."

―위험수당은 얼마나 됩니까?

" 오늘 오신다길래 인터뷰에 앞서 알아보니, 학예수당을 받는 공무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요. 중복지급이 된다는 이유죠. 결국 우리 직원은 잠수를 해도 받지 못합니다. 승선수당도 배에 올라탄 횟수를 따져 한 달 중 보름밖에 안 되면 1만원만 지급된다고 합니다."

바다 밑으로 잠수해 수천억원 상당의 문화재를 건져올렸을 이들이 기껏 돈 몇 만원에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쩨쩨해서 말이다. 이럴 때면 농담밖에 없다.

―유물 몇 점만 팔면 예산이나 직원 복지가 해결될 텐데.

"중앙에서 오시는 분들마다 '건져올린 청자 대접 몇 점 팔면 되겠네' 하고 꼭 한 마디씩 합니다."

[키워드] 최보식이 만난 사람수중 발굴보물선 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