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승 장학관 “당대 역사.정치적 평가따라 성역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역은 당대의 역사적.정치적 평가에 따라 옮겨지고 성역화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충남의 한 교육공무원이 이 충무공의 장례과정 및 묘역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같이 주장, 눈길을 끌고 있다.
홍 순승 충남도교육청 장학관은 16일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가 펴낸 이순신연구논총에서 “이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남해 고금도에 안치되었다가 고향인 아산으로 운구돼 다음 해 2월 11일 금성산에 안장됐다”고 말했다.
이 처럼 84일만에 장례가 치러진 것은 사후 선조로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아 당상관에 오르면서 당시 법도(三月而葬)에 따라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며 첫 묘자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참모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이 잡았다.
두사충은 박상의와 함께 조선 풍수지리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인물로 당시 조선사회에 풍수지리가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는 “이 충무공은 사후 새롭게 평가받아 1604년 좌의정에 오르며 선무공신 칭호를 받자 후손들은 첫 장례가 전란 직후 예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졌다고 조정에 이장을 상소, 첫 장례가 이뤄진지 16년후인 1614년 일등공신에 걸맞은 크기와 이장절차를 거쳐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조(1793년)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으로 또다시 오르면서 묘역에는 상석 및 향로석, 장명등을 비롯한 다양한 석물이 설치되고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 신도비가 세워지면서 격이 한껏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특 히 “근대에 이르러 이 충무공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더욱 활발해져 1908년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해 ’성웅(聖雄)’ 칭호가 붙여진데 이어 제3공화국 시절 역사상 최고조의 평가에 오르며 묘역에는 나지막한 담(곡장)이 처지고 홍살문이 세워지는 등 왕가의 무덤(園)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홍순승 장학관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료로 초장과 이장의 정확한 내용을 규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며 “이장과 확장 등 모두가 당 시대의 이 충무공에 대한 평가 실상이 그대로 반영돼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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