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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집(牧隱集) 행장(行狀)

천하한량 2010. 1. 7. 01:26

목은집(牧隱集) 행장(行狀)

 

 

 행장(行狀)

 

 

 

조선 목은 선생 이 문정공 행장(朝鮮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 [권근(權近)]

 

 

문인 순충익대좌명공신(純忠翊戴佐命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참찬의정부사 판형조사 보문각대제학 지경연춘추성균관사 세자좌빈객(參贊議政府事判刑曹事寶文閣大提學知經筵春秋成均館事世子左賓客)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은 편()하다.


공 의 휘는 색(),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인데,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 사람이다. 증조(曾祖)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된 창세(昌世)이고, ()는 봉훈대부(奉訓大夫) 비서감 승(祕書監丞)에 선증(宣贈)되었고 본국(本國)에서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봉된 자성(自成)이다. ()는 봉의대부(奉議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선수(宣授)되었고 본국에서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으로 문효공(文孝公)이란 시호가 내려진 곡()인데, 원조(元朝)의 원통(元統) 계유년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였고, 호는 가정(稼亭)이며, 문집(文集) 20권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는 요양현군(遼陽縣君)에 선봉(宣封)되었고 본국에서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에 봉해진 김씨(金氏)인데, 천력(天曆) 무진년 5월 신미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한 번 보기만 하면 다 외웠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공의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본국의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우뚝하게 이미 명성이 있었다. 막 관례(冠禮)를 하고 혼인을 하려 할 적에는 한때의 고문 망족(高門望族)으로 사위를 가리는 이들이 모두 공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내려 하여 심지어 혼인하는 날 저녁까지도 서로 다투었다. 끝내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명위장군(明威將軍) 제군만호부 만호(諸軍萬戶府萬戶)에 선수(宣授)되었고 본국에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진 중달(仲達)의 딸이며, 원조(元朝)에서 조열대부(朝列大夫)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었고 본국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낸 한공(漢功)의 손녀에게 장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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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년에는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원조(元朝)에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으므로, 공은 조관(朝官)의 자제로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었는데, 학교에 있는 3년 동안에 중국(中國)의 연원(淵源) 있는 학문을 받아서 절차탁마하고 깊이 연구하여 더욱 크게 진취되었고, 성리(性理)에 관한 글에 더욱 조예가 깊었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작고하자, 공이 분상(奔喪)하여 삼년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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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5월에는 공민왕이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였는데, 공이 여기에 장원(壯元)하여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다. 가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해원(解元)에 합격하고 인하여 진봉사(進奉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충원되어 경사(京師)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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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 년 2월에는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구양현(歐陽玄),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사성(王思誠)이 함께 관장한 회시(會試)에서 공이 또 합격하였고, 3월에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하여 제이갑(第二甲)의 제이명(第二名)으로 발탁되자, 독권관(讀券官)인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
), 한림 승지 구양현 등 제공(諸公)이 크게 칭상(稱賞)하였고, 칙명(勅命)에 의해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다. 이어 본국으로 돌아와서 관리 등용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민왕이 즉시 통직랑(通直郞)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임명하였다.
을미년 봄에는 왕부(王府)의 필도치(必闍赤)가 되어 비목(批目) 쓰는 일을 관장하였으니, 이는 유림(儒林)의 영화로운 선발이었다. 이어 봉선대부(奉善大夫) 시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승진 제수되었다. 여름에는 또 서장관에 충원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경사에 갔다. 8월에는 한림원에 등용되었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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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 정월에는 모친이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니, 대체로 천하(天下)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해 가을에는 본국의 관제(官制)를 고침에 따라 중산대부(中散大夫)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지제고 겸 춘추관편수관 겸 병부낭중(吏部侍郞翰林直學士知制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이 되어 문무관(文武官)의 선발을 관장하였다. 처음에 공이 시정(時政)에 관한 여덟 가지 일을 상언(上言)하여 모두 시행되었는데,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이부(吏部)ㆍ병부(兵部)의 인재 선발하는 일을 회복시키자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임명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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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에는 시국자좨주 지각문(試國子祭酒知閣門)이 되고, 중대부(中大夫)로 지인 상서(知印尙書)가 되었는데, 이것이 필도치(必闍赤)의 장()이었으니, 그 선발은 더욱 영화로운 것이었다. 7월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전임되고 대중(大中)의 품계가 더해졌다. 이후로는 모든 제수(除授)가 있을 때마다 모두 관직(館職)을 겸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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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에는 국사(國事)를 말한 것으로 권귀(權貴)에게 거슬리어 한때의 간관(諫官)들이 모두 좌천(左遷)됨에 따라 공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공이 행장을 갖추고 새벽에 떠나려 하였는데, 그날 밤에 명이 내리어 유독 공만이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 지공부사(樞密院右副承宣知工部事)에 승진 임명되었다. 왕이 재상에게 이르기를, “이색(李穡)은 재덕(才德)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니, 용사(用舍)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심(人心)을 굴복시킬 수 없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의 자리에 가까이 있어 기밀(機密)한 일을 참여하여 관장한 지 무릇 7년 동안에 계책을 진설하고 성심으로 인도하여 국정을 보익한 것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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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11월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시킴으로써 승여(乘輿)가 몽진을 하게 되었는데, 신료(臣僚)들이 허둥지둥하여 대부분이 무너져 흩어졌으나, 공은 왕을 호종하여 곁을 떠나지 않고 일심으로 호위하면서 모의에 참여하여 협찬하고 다사다난한 국사를 널리 구제하여 극복(克復)의 공을 도와서 이룩하였다. 그래서 일등(一等)으로 책훈(策勳)되어 단서 철권(丹誓鐵券)과 아울러 전토(田土) 100(), 노비(奴婢) 20()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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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묘년에는 봉훈대부(奉訓大夫)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선수(宣授)되었고, 겨울에는 본국의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20여 년 동안 국정에 참예하여 들었는데, 그 사이에는 비록 파직되어 한가히 있을 때라도 매양 대정(大政)이 있을 적마다 반드시 공에게 나아가 질문하였다. 을사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윤소종(尹紹宗) 28인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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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년 겨울에는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선수되었고, 본국에서는 판개성(判開城)으로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하였다. 앞서 신축년의 병란을 겪은 뒤로 학교(學校)가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왕이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숭문관(崇文館)의 옛터에 성균관을 고쳐 짓고, 강수(講授)의 인원이 적은 관계로 한때의 경술(經術)하는 선비로서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 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 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 경산(京山) 이숭인(李崇仁) 같은 이들을 선발하여 모두 다른 관직으로 학관(學官)을 겸하게 하고, 공을 그 장()으로 삼아 대사성을 겸하게 하였으니, 대사성을 겸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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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년인 무신년 봄에 사방의 학자들이 모여들자, 제공(諸公)이 경서(經書)를 분담하여 교수(敎授)하면서 매일 강()을 마치고 나서는 서로 의의(疑義)를 논란(論難)하여 각각 최고의 경지를 이루었는데, 공은 온화한 모습으로 한가운데 앉아서 경의(經義)를 변석(辨析)하고 절충(折衷)하되, 반드시 정주(程朱)의 뜻에 합치하도록 힘써 밤새도록 피곤함도 잊었다. 그리하여 동방(東方)에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진흥됨으로써, 학자들이 기송 사장(記誦詞章)을 추향하는 기습을 버리고 신심 성명(身心性命)의 이치를 연구하여, 사도(斯道)를 높일 줄을 알아서 이단(異端)에 미혹되지 않고, 의리를 밝히고자 하여 공리(功利)를 꾀하지 않았으니, 유풍(儒風)과 학술(學術)이 환하게 일신된 것은 모두 선생이 후진들을 교회(敎誨)시킨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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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4월에는 왕이 구재(九齋)에 행행하여 친히 제생(諸生)에게 경의(經義)를 시험 보이면서 공을 독권관(讀券官)으로 삼아 이첨(李詹) 7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기유년 여름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유백유(柳伯濡) 33인을 취했는데, 이때에 처음으로 중조(中朝)의 과거 제도인
역서(易書)통고(通考)의 법을 사용하였다.
앞 서 공민왕(恭愍王)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왕륜사(王輪寺)의 동편에 그의 영전(影殿)을 짓는 데,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여 수년 동안이나 일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마암(馬巖)의 서쪽에 땅을 가려서 더욱 극도로 굉장하게 영전을 짓다 보니, 노동력과 비용이 대단히 많이 들었다. 그러자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 첨서밀직(簽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의 역사(役事)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술사(術士)의 말에도 여기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이롭지 않다고 하니, 내가 부재(不才)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백관(百官)의 장()이 되어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차라리 죽기로써 간()하겠다.” 하고, 이에 상서(上書)하여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였다. 그러자 왕이 크게 노하여 유탁 등을 하옥(下獄)시키고 다른 일로 트집을 잡아 그를 죽이려고 공에게 명하여 대중에게 유시(諭示)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그래서 공이 죄명(罪名)을 물으니, 왕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불의(不義)한 일을 많이 행하여 대한(大旱)이 들게 한 것이 한 가지이고, 연복사(演福寺)의 전답(田畓)을 빼앗은 것이 두 가지이고, 노국공주가 죽었을 때에 3일 동안 제사에 불참한 것이 세 가지이고, 노국공주를 장사 지낼 때에 예()를 강등시켜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전례에 따라서 한 것이 네 가지이다. 불충하고 불의하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요즘에 유탁이 상서하여 영전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니, 지금 비록 이 네 가지 일로 죄를 주더라도 나라 사람들은 모두 상서한 일로 죄를 받는다고 여길 것이고, 또 이 네 가지 일은 모두 죽일 만한 죄가 아니니, 다시 생각하소서.”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글을 지으라고 더욱 급히 재촉하였다. 그러자 공이 엎드려서 말하기를, “신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글을 지어서 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또 상서한 일은 영도첨의(領都僉議)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매우 총행(寵幸)을 받으면서 용사(用事)하였는데, 그가 막 왕의 곁에 있다가 마지못하여 말하기를, “노신(老臣) 또한 그 사실을 알았으나, 다만 왕께서 노여워하실까 하여 감히 고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이 시중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국인(國印)을 봉()하게 하니, 이춘부가 엎드려서 감히 나아가지 못하므로, 신돈이 말하기를, “의당 말한 사람으로 하여금 봉하게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에게 명하니, 공은 왕이 더욱 노할까 염려하여 이에 국인을 봉하고 거기에 쓰기를, “() ()은 삼가 봉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不德)하기 때문에 내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덕 있는 이를 찾아서 섬기거라. 우리 태조(太祖)께서도 처음에 어찌 왕손(王孫)이었던가. 내가 자리를 피해 가겠다.” 하고, 이에 정비궁(定妃宮)으로 옮겨 가 거처하면서 진선(進膳)도 윤허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신돈이 왕의 노염을 풀려고 왕에게 아뢰어, 왕명(王命)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공을 하옥시키고 책망하여 신문하니, 공이 말하기를, “신이 포의(布衣)로부터 외람되이 주상의 알아줌을 입어 갑자기 재상(宰相)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주상의 덕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있기만 하면 죽을힘을 다해서 말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유 시중(柳侍中)이 옥에 갇혀 있는데, 신이 감히 죽을죄가 없다는 것을 남김없이 다 말한 것은 왕께서 감동을 받고 잘못을 깨달아서 대신(大臣)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하고, 인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우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다만 이 한 가지 과실로 인하여 왕의 명성이 후세에 아름답지 못하게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하였는데, 옥관(獄官)이 이 사실을 왕께 갖추 아뢰니, 왕이 마침내 느끼어 깨달아서 유탁 등을 석방시키고, 공에게 목욕(沐浴)하고 조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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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잠(金潛) 33인을 취하였다. 가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가 더해졌다. 이때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는데,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요즘에 물의(物議)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모두들 국가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말하더이다.” 하므로, 왕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문무관(文武官) 모두 제일류(第一流)로 재상을 삼았는데, 누가 감히 비난하겠는가.” 하였으니, 대체로 한때에 양현(兩賢)을 나란히 등용한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었다. 그리고 왕이 매양 공과 성산(星山) 이인복(李仁復)을 불러서 대내(大內)에 들일 적에는 반드시 좌우로 하여금 깨끗이 청소하고 향()을 피우게 하였으므로, 총애받던 중 신조(神照)가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만나면서 어찌 이토록 공경을 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왕이 이르기를, “네가 어찌 이런 뜻을 알겠느냐. 두 공()의 도덕(道德)은 범상한 유자(儒者)가 아니거니와, 또 이색의 학문은 군더더기인 살을 버리고 골수만을 얻은 것이어서, 중국에서도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문데, 어찌 감히 그를 만홀히 대할 수 있겠느냐.” 하였으니, 대체로 왕이 일찍이 제정(帝庭)에 입시(入侍)했을 때 중국의 조신(朝臣)들이 공에게 깊은 소양이 있음을 칭찬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해 9월에는 모친인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을 당하였다. 그 명년인 임자년 6월에는 왕명으로 정당문학에 기복(起復)하게 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는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품계가 대광(大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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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년 가을에 공민왕이 훙()하였다. 공이 요양현군이 작고한 후로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몹시 야위어서 병이 되어 속이 느글거리면서 구토와 설사가 겹쳤는데, 이때 왕의 부음을 듣고는 증세가 더욱 위중해져서, 이로부터 7, 8년 동안 계속 집에서 와병(臥病) 생활을 하였다. 와병 중에는 간혹 왕명을 받들어 지공(指空), 나옹(懶翁) 두 화상(和尙)의 부도명(浮屠銘)을 짓기도 하였으므로, 승도(僧徒)들이 이를 인하여 공의 집에 많이 왕래하였고, 그들이 시문(詩文)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찾아오는 자에 대해서는 그때마다 응해 주었다. 그리하여 부처를 섬긴다는 비난이 퍽 있었는데, 공이 그 말을 듣고 이르기를, “저들이 군친(君親)을 위하여 명복을 빌어 준다고 하므로, 내가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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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년에는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가 더해지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에는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 계해년에는 다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갑자년에는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 을축년에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병인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맹사성(孟思誠) 33인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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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에는 명()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하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력을 잡고 용사하면서 군대를 징발하여 요동(遼東)을 공략하려고 꾀하였는데, 이때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의거(義擧)로써 회군(回軍)하여 최영을 체포해서 물리치고 공을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지금 국가에 불화가 있으니, 왕 및 집정신(執政臣)이 친히 조회하지 않으면 변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왕은 어려서 갈 수 없으니, 이는 노부(老夫)의 책임이다.” 하고, 즉시 경사에 갈 것을 자청하자, 왕 및 국인(國人)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이 있다는 이유로 굳이 만류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신이 포의(布衣)로부터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항상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려고 했었는데, 이제야 죽을 곳을 얻었으니, 설령 도중에 죽어 시신(屍身)으로 국명(國命)을 전한다 하더라도, 진실로 천자(天子)에게 국명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비록 죽더라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경사에 입조(入朝)하니, 고황제(高皇帝)가 공을 가상히 여겨 관례를 초월하여 하사하고 예우를 두터이 하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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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가을에는 사퇴하기를 청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되었다. 겨울에는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던 자들이 공을 탄핵하여 장단(長湍)으로 폄척되었다.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폄척되었다. 5월에는 윤이(尹彝), 이초(李初)를 상국(上國)에 보냈다는 것으로 무함하여 공 등 수십 인을 청주(淸州)에 잡아 가두고 국문을 매우 엄격하게 하여 일이 자못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의당 천명(天命)을 따를 뿐이다.” 하고, 태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런데 수일 뒤에 새벽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정오(正午)가 되기도 전에 산이 무너지고 홍수가 넘쳐흘러 성문(城門)을 무너뜨리고 넘쳐 들어와서 옥사(屋舍)가 모두 물에 잠겼고, 문사관(問事官)은 홍수에 떠내려가다가 나무를 부여잡아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역참을 통하여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공 등을 석방하여 불문에 부쳤다. 이 고을이 생긴 이후로 일찍이 이렇게 심한 수재(水災)는 없었으므로, 모두가 공의 충성이 신명을 감동시킨 소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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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왕은 본디 공에게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알아서 누차 소환(召還)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들의 탄핵으로 인하여 그때마다 다시 쫓겨났으므로, 공이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왕래하는 것을 조롱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는 공을 위태롭게 여겨서 병을 핑계로 가지 말게 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신미년 겨울에는 또 함창에서 부름을 받고 올라오는데, 문인 권근(權近) 또한 충주(忠州)로 폄척되어 가다가 길에서 공을 만나 앞서 사람들에게 들은 말을 공에게 고하니, 공이 이르기를, “이것은 속이는 짓이다. 신하의 도리는 오직 임금의 명령대로 따라서 부르면 오고 물리치면 떠나야 한다. 죽음도 피하지 않는 것인데, 왕래하는 것쯤을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정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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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폄척되었다가, 6월에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7월에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던 자들이 극형(極刑)을 가하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망녕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감히 무복(誣服)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죽더라도 나는 바른 귀신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 말이 전해지자, 왕이 공의 마음을 잘 살펴서 특별히 용서하여 공을 장흥부(長興府)에 이치(移置)시키니, 공을 힘입어 목숨을 온전히 보존한 자가 많았다. 겨울에는 용서를 받고 한주(韓州)로 돌아갔다. 공양왕 초년부터 공을 꺼리는 자들이 누차 계략을 써서 공을 기필코 사지(死地)에 빠뜨리려고 하였으나, 왕이 그때마다 구해 주어 공이 온전할 수 있었는데, 이때에 미쳐서는 공을 꺼리던 자들이 감히 다시 그런 계략을 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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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년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왕이 사자를 보내서 불러 맞이하여 다시 한산(韓山)에 봉하였다. 공이 왕을 만나고 물러 나오자, 왕이 중문(中門)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친구 간의 예로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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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년에 공의 나이 69세였다. 이해 5월에 여강(驪江)에 가서 피서(避暑)하기를 청하고 장차 배에 오르려던 차에 병이 났으므로 아들 종선(種善)을 경성으로 불렀다. 이달 7일에 병이 위독해지자, 어떤 중이 공에게 불도(佛道)를 가지고 말하니, 공이 손을 들어 내저으면서 말하기를, “사생의 이치에 대해서 나는 의심이 없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작고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이 매우 애도하여 음식을 철폐하고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사자를 보내서 조제(弔祭)하고 부증(賻贈)을 특별하게 하였으며,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10월에 자손들이 영구(靈柩)를 받들고 한주(韓州)로 돌아갔다가, 11월 갑인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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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천품이 총명하고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하였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는 자상하고 분명하였고 마음가짐은 관대하였다. 의논하여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데는 명백하고도 간략하고 절실하게 하되 반드시 충후(忠厚)함을 위주로 하였고, 인물(人物)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겸공(謙恭)하고 화락하여 화기(和氣)가 넘치면서도 늠름하여 범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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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재상이 되어서는 성헌(成憲)을 힘써 준행하고 분잡하게 고치기를 싫어하여 대체(大體)를 굳게 지켰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생각이 늙어서도 쇠하지 않아서 매양 사색(辭色)에 드러나고 시문(詩文)에도 나타났다. 후학(後學)들을 힘써 진취시키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윤리(倫理)를 위주로 하되 게을리하지 않고 부지런히 하였으며, 수많은 서적을 널리 보았으되 이학(理學)에 더욱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문장(文章)을 짓는 데 있어서는 붓을 잡은 즉시 써 내려가서 마치 바람이 가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조금도 막힘이 없으되, 사의(辭義)가 매우 정밀하고 격률(格律)이 고상하고 고아하였으며, 호호(浩浩)하고 도도(滔滔)하여 마치 강하(江河)가 바다로 쏟아져 흐르는 것과 같았다. 문집으로는 시() 35, () 20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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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말엽인 지정(至正) 계사년부터 황조(皇朝) 홍무(洪武) 기사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국가의 문한(文翰)을 관장하여 수많은 변고(變故)를 겪으면서 험난한 시기에 사명(詞命)을 잘 작성하여 누차 황제의 칭찬과 감탄을 받았다. 그러다가 공이 폄척됨에 미쳐 공을 꺼리던 자가 문한을 관장하여서는 비로소 표사(表辭)로 인하여 황제에게 책망을 받았으니, 공의 문장과 지식이 세상에 보탬이 된 것이 이러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공민왕은 한갓 공을 공경할 줄만 알았고 공의 말을 다 쓰지 못하였으며, 뒤에 재상이 되기는 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파면되고 마침내 비방을 받음으로써 그 경제학(經濟學)을 끝내 크게 시행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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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집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먹을 것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고 비록 먹을 것이 자주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러도 그것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평생에 급한 말이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가인(家人)이나 노복(奴僕)이 혹 과실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천천히 사리로써 깨우쳐 타일러 주었고, 일찍이 성내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술자리에서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처신하여 또한 난()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고, 심회가 쾌활하고 언동이 조용하며 희로(喜怒)와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아서 혼연한 일단(一團)의 화기(和氣)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총록(寵祿)의 지위에 있었으나 교만한 태도를 볼 수 없었고, 만년에는 험난한 시기를 만났으나 실의에 찬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감옥에 갇힌 것도 욕될 것이 없었고, 높은 관작도 영화로울 것이 없었으니, 공의 마음을 잘 수양하고 지켜 실천한 데에 대하여 또한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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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종덕(種德)은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이고, 차남 종학(種學)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인데, 병진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무진년에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으며, 기사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이상은 모두 공보다 먼저 작고했다. 그다음 종선(種善)은 중정대부(中正大夫) 전교령 지제교(典校令知製敎)인데, 임술년에 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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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직은 4남을 두었는데, 장남 맹유(
)는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고, 그다음 맹균(孟畇)은 승봉랑(承奉郞) 고공 좌랑(考功左郞)인데, 을축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임신년에 진사가 되었고, 그다음 맹진(孟畛)은 인덕궁 사견(仁德宮司涓)이다. 딸이 둘인데, 장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추부 우부대언(承樞府右副代言)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종부령(宗簿令)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첨서는 6남을 두었는데, 장남 숙야(叔野)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사재소감(司宰少監)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성균 생원(成均生員)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호용순위사 부사직(虎勇巡衛司副司直)이고, 그다음 숙묘(叔畝)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사수소감(司水少監)이며, 그다음 숙복(叔福)은 성균 생원이고, 그다음 숙치(叔畤)는 어리다. 딸이 둘인데, 장녀는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고, 그다음은 어리다. 전교령의 1남은 계주(季疇)이다. 증손(曾孫)은 남자가 7인이고, 여자가 9인이다.

 

[주D-001]역서(易書) : 과거(科擧)를 보일 때 고시관(考試官)이 시험 답안지에 쓴 응시자(應試者)의 필체(筆體)를 알아보고 혹 사정(私情)을 둘까 염려하는 뜻에서, 서리(胥吏)를 시켜 모든 답안지를 고쳐 쓰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통고(通考) :
문과(文科)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서 각각 세 단계로 다른 시험을 보이는 초장(初場)ㆍ중장(中場)ㆍ종장(終場)의 시험 성적을 통괄하여 채점하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