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문]
계해년(1803) 봄 3월 10일, 생원 한대연을 찾아갔다. 대과에 낙방한
대연은 하는 일 없이 지내면서도 나처럼 밖에 나가 놀지 못하였다. 함께 백문(白門:서대문) 성곽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
하지만 북산(北山:인왕산)의 육각봉*까지 갈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때마침 밤새 내린 비가 아침나절에 개어, 성곽을 등진 인가마다 복사꽃 살구꽃이 한창 곱게 피었고, 성 밑으로 호젓하게 이어진 오솔길은 향기로운 풀이 뒤덮었다. 따사로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서 너무도 즐거웠다.
우리는 함께 계곡을 건너고 소나무 숲을 지나 들뜬 마음으로 신명나서 걷다 보니 어느새 육각봉에 이르렀다. 풀밭에 앉아 잠깐
쉬면서 북쪽 동네에 피어 있는 꽃을 구경했다. 그런 다음 오씨네 동산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노닌 사람 모두가
술에 취했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 혼자 취하지 않았는데, 대연이 강권하여 억지로 석 잔이나 마신 탓에 주량이 약한 나는
더욱 크게 취하고 말았다. 이날 봄나들이에서 나보다 더 취한 사람은 없었다.
서대문 성곽부터 육각봉까지는 한양에서 꽃을 구경하기에 가장 빼어난 곳인데 오늘 모두 다 구경했다. 그렇다면 봄놀이를 두루 즐긴 것은 또 올해 만한 때가 없을 것이다.
*육각봉(六角峰) : 인왕산 필운대 옆에 있는 고개로, 육각현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배화여대가 자리하고 있다.
[원문]
癸亥春, 三月十日, 往見韓大淵上舍, 大淵下第閑居, 亦如余之不出游也. 於是, 共登白門之郭觀焉. 至於北山之六角峰, 未期其到也.
時夜雨朝霽, 背郭人家桃杏正姸, 城底一路幽靜多芳草, 和風悠然而來, 甚樂也. 遂相與涉谿澗, 穿松林, 誇步屧以嬉, 遽已至於六角峰矣.
坐莎上少憩, 看北巷之花, 又飮于吳氏之園而歸. 同游諸子悉醉, 余以不飮故獨不醉, 爲大淵所勸, 强飮三鍾, 余以不飮故又大醉, 是游也,
醉莫如余也. 夫自白門之郭, 至六角峰, 京城看花之勝也, 而今盡訪焉. 然則春遊之遍, 又莫如今年矣.
- 유본학(柳本學, 1770~1842?), 「유육각봉기(游六角峰記)」, 『문암문고(問菴文藁』 (안대회, 『고전 산문 산책』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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