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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공사관과 의료진 모습.

천하한량 2007. 11. 14. 01:43

구한말의 공사관과 의료진 모습.

 


정동 미국공사관(1880)
최초의 미국공사관 건물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에서 다른나라에 비해 많은 이권을 가졌다.
철도 부설권, 전기 사업권, 광업권등, 1895년에는 미국인 모오스에게 운산 금강채굴권
허가와 운영권 까지 주었다.



주한 영국 대사관(1900)
1884년고종황제께서는 외국인들이 서대문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용한 직후 아스톤은
정동에 토지를 구입했다. 당시 멕시코 금화 1,200달러, 영국 파운드화로 환산하면
약 225파운드에 구입된 것이다. 이 토지는 주한 영국대사관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이며,
오른쪽 상단에 영국국기가 달려있다




주한 프랑스 공사관(1907)
6.25때 본 건물은 소실 되었다. 한불조약 비준서의 교환은 1887년 프랑스 카톨릭
외방전교의 선교활동으로 개화의 영향을 크게 준 나라이다.




일본 총독부 관서(1900)
일본은 이시기에 식민지 정책을 강요했다. 서울 남산 중턱에 있는 총독부 관저 건물이다.
통감부가 서기전까지 일본 대표부 공사관으로 사용했었다. 공사관이 있던 남산
녹천장 주변전경이다.

 


청국 공사 관원(1900)

 


러시아 공사관(1896)
정동 러시아 공사관은 경향신문사 정면에 있었다. 6.25때 파괴되고 지금은 망루만 남아 있다.
당시 이 주변에는 외교관들이 집결되어 있어 비밀요원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되었다.

 


개화파 동지들(1884)
민영익 일행이 미국사행을 끝내고 귀국, 갑신정변 직전에 촬영한 기념사진.
서광범이 기념앨범을 들고 있다. 유길준, 홍영식, 김옥균, 민영익 중앙에 학모를
쓴 소년은 박용하, 최초로 학생신분으로 일본에 유학했다. 당시 이 사진은
1884년 일본으로 떠나기 전 기념으로 촬영된 것이다.





신헌(1876)

신헌은 조산전권대신으로 1876년 조일조규, 한미조약을 각각 체결하였다.
당시 서양인들은 대신들이 쓰고 있는 사모뿔을 임금의 말을 잘 듣기 위한
음향판으로 생각했다.





개화승 이동인(1881)

봉원사 스님, 1881년 일본에서 군함구입을 위해 전력하다 실패한 후 행방불명,
사진좌측의 함은 신사유람단을 수행할 때의 밀사함이며,
우측의 신식가방이 특이하다.




로저스 제독의 강화도 상륙작전 회의(1871)



조선군 포로의 모습(1871)
그당시 조선군은 무더위 속에서도 방탄용으로 솜옷을 입고 전투했으나 희생자가 많았다.
오른쪽 포로병은 미국 승무원 상의를 입고 있다.




영국함대 거문도 정박(1890)
1878년에 제작된 영국 해군 중국 주둔 페가수스 함대소속 슬루프를 포함하여
1885년 4월 15일 영국함대의 거문도 점거작전에 참가했다.
이 군함의 함장 grenfell이 직접 촬영한 영국함대와 전경
 



거문도 총장 상승(1890)
영국 군함 HMS. Daring 호를 방문한 거문도 주민대표이다. 선상조타실에서 데이비스
함장이 촬영하였다.촌장은 버선을 벗고 있어 3사람모두 발모양이 다르다.
영국인들은 주민들이 아프면 서양의술로 치료해주고, 마을 아녀자가 지나가면
뒤로 돌아서서 그녀가  지나갈동안 고개를 숙이고 예절을 다하였다




 

영국의료진 기념촬영(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