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초신응식 ▒

석초(石艸) 신응식선생 (申應植 1909~1975)의 생애와 약력

천하한량 2007. 4. 24. 18:25

 

 

 

 

 

 

석초(石艸) 신응식(申應植) (1909~1975)

 

 

 

[생애와 활동]

 


 

1909년 6월 4일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조선시대 문신이며 시인이었던 석북 신광수의

 

7대손이며 신긍우의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남.

 

신석초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학으로 공부하다가

 

192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병으로 중퇴하였다.

 

이 무렵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으며,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 철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에 가담하여 신유인이라는 이름으로 평론활동을 한 바 있다.

 

알려진 바로는 1931년 일본 호오세이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당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카프에 가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카프의 맹원으로서 당시 카프의 강경노선을 공격한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항(抗)하여>

 

를 발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카프의 창작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크게 일어났다.

 

그가 박영희의 전향선언과 함께 카프에 탈퇴원을 제출한 것은 1933년이다.

 

1935년 무렵 정인보의 소개로 이육사를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시 <호접>, <무녀의 춤>, <파초>, <가야금>, <기>, 평론 <이상과 능력의 문제> 등을 발표했다.

 

1935년에는 <신조선> 편집일을 맡아보았고, 1948년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1957년에는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65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5~66년 한국문인협회 시분과위원

 

장 등을 지냈다.
 

 
 약력

1909년 6월 4일 충남 서천군 한산 출생

1921년 한산보통학교 3학년 편입

1925년 경성제일고보 입학
1928년 신병으로 제일고보 자퇴
1929 도일(渡日)
1931년 도일,일본 호세이대학 철학과 청강생 자격으로 입학, 카프의 맹원으로 활동
<중앙일보>에 유인(唯仁)이란 필명으로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항하여>를 발표
1933년 박영희와 함께 카프 탈퇴,자신의 부르조아적 환경과 사상의 괴리(乖離)에 따르는 고민을 해 오다가 우연히 발레리의 <테스트씨>를 읽고 크게 영향을 받아 학교도 포기하고 발레리를 읽기 위해 프랑스어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발레리에게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영향이 있음을 발견, 자신도 노장사상에 대해 관심


1935년 귀국,한학(漢學)의 스승인 위당 정인보 선생의 소개로 이육사와 교유하며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여유당전서}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신조선>에 석초(石初)란 필명으로 <비취단장>·<밀도를 준다>, 에세이 <햄릿>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본격화

그때 육사가 가져간 <비취단장(翡翠斷章)> <바라춤 서사(序詞)> <뱀> <검무랑(劍舞娘)> <파초> 등 시작품들이 육사를 통해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동인지 [자오선(子午線)] [시학(詩學)], 그리고 [문장] 등에 발표됨으로써 시단에 알려졌다.

  이때의 시편(詩篇)들은 발레리의 영향에 의한 지적 방법의 도입과 동양적 허무사상을 바탕으로 한 우아한 형식미(形式美)의 추구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부유한 성장과정과 귀족적인 성격 때문에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던 그는, 육사 이외의 문단인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고 향리에서 혼자 시를 썼다.


1936년 서정주, 오장환, 이육사, 김광균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
1937년 서정주, 윤곤강, 이육사 등과 함께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
1938년 이육사·최용·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이육사와 부여 관람,
1943년 1월 신정에 이육사의 베이징행을 의논함,
1946년 해방 전의 작품들을 모아 처녀시집 <석초시집>을 간행,<바다에><바라춤>
1948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피선
1949년 부친 사망으로 다시 귀향,
1951년 화양면장 부임
1952년 지방자치법에 의해 화양면장에 재추대되어 부임
1954년 한산중학교 이사 피촉
1956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취임
1957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

1959년 시집<바라춤> 발표
196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출강
1962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64년 <처용은 말한다.>(1964.장시.현대문학). 4월 이효상(李孝祥)·조지훈(趙芝熏) 등의 협조를 얻어 <이육사 선생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조직, 이육사 시집을 『청포도』라 개제하여 서울 범조사에서 9월 15일자로 다시 발간.8월 16일 안동에서 육사 시비 건립 기념 강연회.
1965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회장
1968년 예술원상을 수상

1970년 시집<폭풍의 노래>발표

1971년  <고풍(古風)>발표

1974년 시집<처용은 말한다>발표
1975년 3월 8일 사망, 장지(葬地) : 경기도 양주읍 장흥면 신세계공원 묘원.

 상훈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 - <바라춤>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저서명 부서명 총서명 출판사 출판년
시집<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시집 <바라춤> 통문관 1959
시집 <폭풍의 노래> 문예사 1970
시집 <처용은 말한다> 1974
시집 <수유동운(水踰洞韻)>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