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운동가이자 청년운동가인 이상재(李商在)의 본관은 한산이며, 자는 계호(季皓)이고, 호는 월남(月南)이다. 그는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한산군 북부면에서 아버지 희택(羲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고, 1864년 강릉 유씨(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하였다. 이를 개탄한 월남은 낙향하여 은둔하고자 했으나, 친족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의 집에서 식객으로 있다가 이후 1880년까지 13년 동안이나 개인비서로 일했다.
1881년 월남은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조준영, 김옥균 등 10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안종수, 고영희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월남은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등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했다.
1884년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이 그를 인천 우정국의 주사(主事)로 임명했으나, 그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감옥서 요한복음 읽고 감명받아
1887년 월남은 내무협판으로 있던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1888년 10월 귀국한 뒤 잠시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 위원, 1894년에는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관, 학부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 중학교, 소학교, 외국어학교를 설립하였고, 한때는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하기도 했다.
월남은 1896년에는 내각총서와 중추원 1등 의관이 되었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국운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이 해 7월 그는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간부를 역임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의장과 사회를 맡아보았다. 당시 그는 독립협회의 각종 토론회에서 명사회자로 이름을 날렸다.
1898년 11월 월남은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 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여 두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동지 16명과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심상훈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월남은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혔다.
그러나 정부 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이른바 개혁당 사건에 연루된 월남은 한성감옥서에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월남은 감방에서 우연히 거적자리 밑에서 발견한 요한복음을 읽다가 감동받은 다음 열심히 성경과 기독교 관련서적을 통독하고 54세의 나이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위대한 왕의 사자’가 세번이나 믿을 기회를 주었는데도 왜 신앙을 하지 않느냐고 질책하는 신비체험을 했다고 전한다. 월남이 워싱턴에 있을 때 기회를 주었는데 거절한 것이 첫번째 큰 죄이고, 독립협회에 가담했을 때도 기회를 주었는데 자기만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믿지 못하게 방해한 것이 두번째 죄이고, 결국 민족이 진보할 길을 막았으니 더욱 큰 죄를 지었으니 지금이라도 잘못을 회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월남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확신하고 성경을 세번이나 통독하면서 기독교신앙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904년 2월 월남은 감옥에서 석방된 뒤 서양선교사 게일이 담임목사로 있던 연동교회에 옥중동지들과 집단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
또한 그는 김정식, 유성준 등과 함께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 위원장이 되어 민중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그는 1908년 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 총무를 맡아 성서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중심의 신앙운동을 주도했으며, 1909년에는 “동포여 각성하라”를 외치며 구국운동에 앞장섰고 ‘백만인 구령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가 무단통치를 강행하자, 월남은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가난한 청소년들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1913년 월남은 63세의 나이로 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여 사멸 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그는 1926년 명예총무로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청년회의 재정 확립과 지방으로의 확장을 이룩하였다.
1914년 월남은 재일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 배재, 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 YMCA를 망라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민중계몽운동에 전념하면서 날카롭고 의미심장한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며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모든 민간단체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고 집회, 출판,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이후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었는데 이는 월남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이었다. 그는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부터 월남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전국연합회 회장으로서 제 2독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소년척후대운동, 학생청년회운동 등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 토론회, 일요강좌, 농촌운동, 지방순회운동, 각종 체육활동, 음악회 등을 통해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그는 부모제사를 지내는 일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기독교의 잘못된 부모 공경방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부모제사 모시는 일 우상숭배 아닙니다"
1922년 월남은 신흥우, 이대위, 김활란, 김필례 등의 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에서 열린 제1차 만국기독교학생동맹대회(WSCF)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 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1922년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여 준비위원장이 되었고, 창문사를 설립하여 기독교 문서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 그는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소년척후단(보이스카웃) 초대 총재, 1925년 제 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서 한국 언론계의 활동 진작과 단합에도 기여하였다. 1927년 1월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월남은 창립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해 3월 29일 월남은 서울 재동 자택에서 가족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면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한산에 있던 선영에 안치되었다. 이후 1957년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가 쓴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유저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천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 ‘진평화’(眞平和), ‘청년회문답’ 등이 있다.
월남은 넓은 도량과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로 여유있는 풍자와 기지가 넘치는 해학으로 당시 살벌했던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경구와 유머로써 제어했다.
또한 그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지만 강직한 기상과 굳센 의지를 지녔고, 항상 정열에 불타 나라를 사랑한 ‘만년 청년’으로서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정신을 심기 위해 노력한 청년운동가요 교육가였다. 특히 월남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무저항 비폭력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위대한 선각자요 시민운동의 등대로서 ‘조선의 거인’ ‘조선의 성자’로 추앙받는다.
김 탁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