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曉의 和諍과 華嚴思想
全 好 蓮(海住)*
머리말
元曉(617∼686)가 태어나 수학하고 교화를 펼친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 전후기이다. 오랜 전란으로 민심이 피폐하고 갈등이 심화되었던 당시에, 원효가 고민하고 신라사회에 끼쳤던 영향은 바로 갈등의 화해와 고통의 소멸이었다. 그가 和諍國師라 불리게 된 데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그의 사상과 덕화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빛이 감소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갈등이나 대립의 화해는 바로 華嚴思想의 핵심이기도 하니, 원효의 깨달음과 화쟁원리는 분명 화엄과 어떠한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일심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원효의 화쟁정신이나 화엄사상에 대해서 이미 연구된 바는 많으나, 그러나 원효의 화쟁과 화엄을 일관되게 관련시켜 원효사상을 다룬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 원효의 화쟁정신을 일심으로 파악하고도 있으나 그 일심은 {起信論疏}·{別記}에 입각한 여래장 일심으로 보는데 그치고 있어서 화엄과 화쟁이 연결되고 있지 않다. 이에 본 고에서는 화쟁국사로 알려진 원효의 화쟁사상의 근거가 되는 일심이 여래장일심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 화엄일심으로까지 발전되어 있음을 원효의 무애행과 교판설 그리고 보법설에 관련시켜 밝혀보기로 한다. 또 그러한 원효의 화엄사상을 현존하는 {華嚴經疏}를 통해서도 살피고, 설화 속에 전해지는 원효의 면모를 덧붙여서 화엄보살로서의 원효의 불교세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Ⅰ. 元曉의 和諍思想
원효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 22부가 현재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원효의 화쟁사상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우선 {十門和諍論}을 들 수 있다.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화쟁의 내용은 10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十門和諍論}은 全文이 다 전하지는 않으므로 그 10문에 대해서는 전후 내용과 다른 저술들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그것은 三乘一乘·空有異執·人法異執·三性異義·五性成佛·二障異義·涅槃異義·佛身異義·佛性異義·眞俗異執의 和諍門 등으로 간주된다. 원효는 三乘과 一乘, 空과 有, 眞과 俗 등의 異執과 異諍을 화해시키고 회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十門의 十이라는 數는 화엄에서의 원만수이니 無盡의 의미이다. 그런데 원효의 화쟁정신은 이 {십문화쟁론}만이 아니라 원효 저술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각 경론의 대의를 밝히는 부분에서부터 원효의 화쟁사상을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涅槃宗要}에서 {涅槃經}의 핵심내용인 열반을 드러내는 방편 역시 화쟁을 통해서임을 볼 수 있다. 원효는 {涅槃經}의 대의를 밝히는 부분에서,
이 경은 불법의 大海이고 方等의 秘藏이니, 그 교됨은 측량하기 어렵다. 진실로 넓어서 끝이 없고 깊고 깊어서 밑바닥이 없다. 밑바닥이 없으므로 다하지 못함이 없고 끝이 없으므로 다 포섭하지 못함이 없다. 여러 경전의 부분을 통섭하고 만류의 一味에 돌아가 佛意의 至公을 열고 百家의 異諍을 화해시켜, 드디어 시끄러운 四生으로 하여금 無二의 實性에 돌아가게 하고 꿈꾸는 긴 잠을 大覺의 극과에 도달하게 한다.
라고 하여 {涅槃經}은 百家의 異諍 즉 모든 異說의 쟁론을 화해시킨다(和百家之異諍)는 것이다.
{大乘起信論別記}에서는 {大乘起信論}의 大意를 밝히는 부분에서 {중관론} {십이문론} 등은 파할 줄만 알고 {유가론} {섭대승론} 등은 세울 줄만 아는데 반해, {대승기신론}은 세우고 파함이 자재해서 諸論의 祖宗이고 群諍의 評主가 된다고 한다. {금강삼매경론}에서 천명하고 있는 원효의 실천 수행관 역시 화쟁의 논리로 전개되고 있다. 경의 대의는 일심의 근원과 삼공의 바다(一心之源 三空之海)를 밝힌 것이니 그것은 有無·眞俗이 둘이 아니면서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음을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원효는 性相을 융섭해 밝히고 古今을 포괄하여 百家異諍의 端을 和解하였다고 추앙되었던 것이다.
Ⅱ. 和諍의 근거, 一心
그러면 그러한 화쟁이 성립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一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일심 역시 원효저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요내용이기도 하다. 원효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유식·여래장·열반·화엄 등은 유심설이 그 주종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원효의 깨달음의 내용과도 연결되어 있다. 원효의 저술에서 보이는 사상과 실천행은 그의 깨달음의 힘에 의해서일 것임은 추정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宋高僧傳}에 언급되어 있는 그의 깨달음의 계기와 내용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원효는 唐 玄濱(602∼664)의 唯識思想에 뜻을 두고 유학의 길에 올랐다가 心生法生의 이치를 깨닫고 유학의 뜻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효가 읊은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라는 내용은 {기신론}에 보이는 일심설에 의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기신론}에서는 如來藏인 衆生心가운데 生滅心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 하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일화는 원효의 일심관이 유식에서 여래장으로 바뀌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이 心生 내지 法滅의 구절을 "無明力을 의하여 不覺心動으로 乃至 能現一切境等이므로 心生卽種種法生이라 말한 것이고, 만일 무명심이 멸하면 경계가 따라 멸하여 모든 분별식이 다 滅盡하는 까닭에 心滅卽種種法滅이라 말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신론}의 설을 보기로 하자.
또 생멸인연이란 중생이 心을 의하여 意와 意識이 轉하는 연고이다. 무슨 의미인가? 阿梨耶識을 의지하여 無明이 있다 설하니, 不覺에 起하여 능히 보며 능히 現하며 능히 경계를 취하여 念을 일으킴이 상속하므로 意가 된다고 설한다. 이 義에 5종의 名이 있으니 첫째는 業識이니 무명의 힘으로 不覺에 心이 動함을 말하는 까닭이다. 둘째는 轉識이니 動心을 의하여 능히 상을 보는 연고이다. 셋째는 現識이니 능히 일체경계를 現함이 마치 밝은 거울이 색상을 나타냄과 같아서, 현식도 그러하여 五塵을 따라서 對가 이르름에 바로 나타내어 전후가 없는지라 일체시에 뜻좇아 일어나서 늘 앞에 있는 연고이다. 넷째는 智識이니……
그러므로 三界가 虛僞라 唯心으로 지은 바이니 心을 여의면 육진경계가 없다. 무슨 뜻인가? 일체법이 모두 心으로 좇아 일어나서 망념으로 생한지라, 일체분별이 곧 자심을 분별함이니 心이 心을 보지 못하여 상을 가히 얻을 게 없다. 마땅히 알라. 세간 일체 경계가 다 중생의 무명망심을 의하여 주지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거울 가운데 상과 같아서 체를 가히 얻을 게 없다. 유심인지라 허망함이니, 心이 生한즉 종종법이 생하고 心이 멸한즉 종종법이 멸하는 연고이다.
心인 阿梨耶識이 생멸의 因이고 아리야식에 있는 무명이 생멸의 연이 되어 意가 있으며 意에 業識·轉識·現識·智識·相續識의 五意가 있다. 이 중에 업식·전식·현식이 나타나고 멸함이 아리야식과 아리야식에 있는 무명에 의한 것이므로, 아리야식인 心이 생하면 종종법이 생하고 心이 멸하면 종종법이 멸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 {기신론}에서는 阿梨耶識을 "불생불멸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님을 아리야식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이 아리야식에 업식·전식·현식을 배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원효가 깨달아 읊어낸 心은 불생불멸이 생멸과 화합한 심으로서 이는 여래장심과 다른 것이 아니다. {別記}에서도 생멸심에 대하여 所依의 如來藏과 能依의 생멸심을 함께 취하여 합해서 심생멸문이 된 것이니, 심생멸이라는 것은 여래장에 의한 까닭에 생멸심이 있으며, 여래장을 버리고 생멸심을 취하여 생멸문을 삼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처럼 원효의 여래장 사상은 유식 사상을 포섭하고 있으니 그것은 {二障義}에서 隱密門에 顯了門을 內屬함에서도 보인다. 二障은 번뇌장과 소지장이니 현료문에서는 이장이 되고 은밀문에서는 煩惱碍와 智碍의 二碍가 된다. 현료문에서는 유식적 입장에서, 은밀문에서는 여래장적 입장에서 각각 二障과 二碍라 부르고 있다. {기신론소}에서도 二碍를 설명하면서 이는 {二障章}설과 같다고 {이장의}에 그 설명을 미루고 있다. 원효는 여래장을 유식의 우위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원효의 一心觀은 그의 실천행을 야기시키는 원동력임을 볼 수 있는데, 그 실천내용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저술은 만년의 {금강삼매경론}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그 {금강삼매경론} 역시 {금강삼매경}의 내용을 화쟁의 방편으로 서술하고 있음은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는데 이 또한 一心에 의하고 있다.
대저 一心의 근원은 有無를 여의어 홀로 청정하며, 三空의 바다는 眞俗을 융화하여 담연하다. 담연하므로 둘을 융화하되 하나가 아니며, 홀로 청정하므로 양변을 여의었으나 가운데[中]는 아니다. 中이 아니되 양변을 여의었으므로 有가 아닌 법이 곧 無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無가 아닌 相이 곧 有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一)가 아니로되 둘(二)을 융화하기 때문에 참(眞)이 아닌 일이 애초부터 俗되지 않고, 俗이 아닌 理가 애초부터 참되지 않다. 둘을 융화하지만 하나는 아니기 때문에 眞과 俗의 性이 성립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의 상이 갖춰지지 않는 곳이 없다. 양변을 여의나 中은 아니기 때문에 유무의 법이 짓지 않는 바가 없고, 是非의 의미가 미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破하는 일이 없지만 파하지 않음이 없으며, 세우지(立) 않지만 세우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 그러하지(然) 않는 大然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말하자면 이 經의 大意이다.
一心은 有無를 떠나 있으며, 그래서 眞俗이 둘이 아니고 一·二, 染·淨 또한 다르지 않다고 한다. 眞俗圓融의 和諍은 一心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金剛三昧經論}의 일심설 또한 {大乘起信論疏}·{別記}의 여래장일심과 무관하지 않다. 원효는 {기신론}의 여래장설 역시 유식과 중관을 화해시키는 立破無楝 開合自在의 원리라고 하여 기신론을 쟁론의 평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기신론}에서 말하는 진여와 생멸이 모두 일심의 二門이기 때문에 대립적으로 보이는 眞如門과 生滅門을 화해시킨 것으로 본다. 즉, 진여문과 생멸문이 대립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점에서는 다를 수가 없다. 일심에 의해 이문이 있으므로 이문이 화합된 일심은 궁극적인 본원에서 두문의 상호작용(立·破)을 통해 體相用 三大를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원효의 화쟁정신과 일심관을 볼 때 그동안 원효의 화쟁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일심이고, 화쟁의 원리인 일심은 {기신론}의 여래장심이라고 주장되어 온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원효의 一心觀은 이 여래장심에 머물지 않고 다시 화엄의 유심설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는 {별기}에서 {기신론}이 二門을 一心에 열어서 여러 경전의 肝心을 꿰뚫고 있다고 하면서 {화엄경}도 포함시키고 있다. 唯識의 일심이 妄心이고 여래장심이 眞妄和合心이라면, 화엄일심은 眞心이니 如來性起心이다. 원효의 일심이 진망화합의 여래장심에서 여래성기의 화엄일심으로 전환되었다고 하겠으니, 그것은 원효의 화엄과의 관계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원효는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찬술하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하였다. 그리고는 화엄적 실천을 위해서 중생 속으로 회향하러 뛰어 들었다. 그때 원효가 외친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물론 {화엄경}에 교설된 게송이다. 원효는 무애박을 두드리고 무애가를 부르고 무애무를 추면서 천촌만락을 다니며 교화행을 펼쳤다. 중생계로 뛰어들어 일승 화엄의 무애정신을 몸소 실천한 원효의 실천행은 화엄보살행이며 그것은 바로 如來出現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如來出現은 如來性起이니 元曉의 一心은 화엄의 如來性起心이라 볼 수 있다고 하겠다.
Ⅲ. 四敎判과 普法華嚴
원효의 {기신론}사상은 중국화엄가들이 교판하고 있는 삼승종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엄의 普法 단계까지 올라가 있으니, 원효가 보는 기신론의 三大는 보법 화엄의 세계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를 통해서도 원효의 일심은 여래장심에서 다시 한 단계 더 나아가 화엄의 일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원효는 그의 四種敎判說에서 화엄을 일승만교라 교판하여 가장 수승한 교설로 강조하고 있다. 원효 교판의 기준은 法空과 普法에 의한 三乘과 一乘, 分敎와 滿敎이니 일승만교로서 {화엄경}과 보현교를 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分·滿 이교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인 보법이란 무엇인가? 표원은 그의 {華嚴經文義要決問答}에서 원효의 보법설을 소개하고 있으니, 보법이란 일체법이 相入·相是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일체 법이 크고 작은 것, 하나와 많은 것 등의 범주에서 서로 들어가 포섭하고 상호동일한, 넓고 탕탕한 {화엄경}의 세계를 보법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법이 그렇게 상입 상즉하여 무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효는 이에 대하여 열 가지 因을 들고 있다.
① 하나와 일체가 서로 비추고 비추어지니, 제석천 궁전의 보배그물 망과 같은 까닭이다.
② 하나와 일체가 서로 緣하여 모임이 되니, 동전수와 같은 까닭이다.
③ 모든 것이 唯識이니 꿈과 같은 까닭이다.
④ 모든 것이 實有가 아니니 幻과 같은 까닭이다.
⑤ 同相て異相이 일체에 통하기 때문이다.
⑥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이 같은 양이기 때문이다.
⑦ 法性緣起는 性을 여의기 때문이다.
⑧ 一心 法體는 하나도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⑨ 無碍法界는 가도 없고 가운데도 없기 때문이다.
⑩ 法界는 으례 그러하여 장애가 없는 까닭이다.
이러한 보법의 10因 중에는 위에서 화쟁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일심의 내용 그대로인 것도 보인다. 모든 것은 유식이고 법성연기이며, 일심 법체는 하나도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애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至大至小가 그 양이 같다고 하는 제6인의 내용은 원효가 특히 강조한 점으로 추정된다.
지극히 큰 것[至大]은 밖이 없는 것[無外]을 이름이니, 밖이 있다면 큰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작은 것[至小] 또한 안이 없는 것[無內]이니, 안이 있다면 지극히 작은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밖이 없는 大는 큰 허공을 이름이요, 안이 없는 小는 작은 미진을 이름이다. 안이 없으므로 밖이 없으니, 안과 밖은 서로 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은 지극히 큰 것과 같다. 이같이 大小가 같은 양인 줄 안다면 모든 대소에 걸림이 없으리니, 이것이 불가사의한 해탈이다. 그러므로 이를 인하여 초발심한다.
고 하는 이 제6인의 經證으로는 {화엄경} [十住品]에서 교설하고 있는 "지극히 큰 것에 작은 상이 있음을 알고자 하여, 보살은 이를 인하여 발보리심한다"라는 구절인 것으로 보인다. [십주품]에서는 신심을 원만히 성취한 보살이 三世諸佛家에 머문다고 하면서 그 머무는 곳을 열가지로 보이고 있다. 그 중 처음 [初發心住]에서 보살이 발심하여 일체법이 곧 마음 자성인 줄 알아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한 초발심의 인연이 다양하게 설해진 가운데 위의 '欲知至大有小相'의 인연도 말씀되고 있다. 원효는 {기신론소}에서도 대승 즉 중생심의 체는 크다고 말하고자 하나 無內에 들어가되 남음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자 하나 無外를 포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여, {기신론}의 일심도 이러한 至大至小 同一量의 화엄세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Ⅳ. {華嚴經疏}에 나타난 華嚴思想
이상에서 원효의 화쟁원리는 화엄의 일심세계임을 보았는데, 그러한 원효의 화엄사상은 무엇보다도 그의 화엄관계 저술에서 보이는 것이 정수가 된다고 하겠다. 원효의 화엄관계 저술로서 현존하는 것은 {화엄경소}뿐이다. 그것도 [서분]과 [광명각품소]만 남아 전해지므로 원효 화엄사상의 전모를 볼 수 없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엄경소}는 {보법장}의 경우처럼 의상이 귀국한 671년 이후의 저작으로 보인다. 원효가 {화엄경소}의 [서분]에서 보이고 있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은 보법설에서 설명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화엄경소}에는 화엄세계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무장애법계법문이란 법이 없되, 법 없음이 없고 문이 아니되,
문 아님도 없다. 非大非小 非促非奢 不動不靜 不一不多이다.
크지 않으므로 極微가 되어도 남음이 없고,
작지 않으므로 大虛가 되어도 남음이 있다.
빠르지 않으므로 능히 삼세겁을 머금고,
느리지 않으므로 온통 체 그대로 일찰나에 들어간다.
움직이지도 고요하지도 않으므로,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생사이다.
하나도 아니고 많음도 아니므로,
일법이 일체법이고, 일체법이 일법이다.
이러한 무장무애의 법은 법계법문의 묘술을 지으니,
모든 보살이 들어갈 바이고, 삼세제불이 나오는 바이다.
[華嚴經疏序]에서는 이처럼 普法說의 大小, 一多에 促奢, 動靜의 相入과 相是를 더 설정하고 있다. 진리의 세계는 크고 작음, 빠르고 느림, 움직이고 고요함, 그리고 부분과 전체라는 상대성을 초월해 있다. 이러한 시비가 일어날 수 있는 상대적인 일체 경계를 초월한 화엄세계를 무장무애한 法界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원효는 생사와 열반에 자재한 경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一然이 {삼국유사}에서 [元曉不羈]라고 칭함은 바로 이러한 원효의 무애경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소}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광명각품소]에서도 원효의 화엄경관을 알 수 있다. 원효는 [광명각품]에 대하여, "여래께서 광명을 비추어 시방의 우주를 널리 비추어 여러 대중의 어둡고 막힌 장애를 걷어내 없애게 하는 한편 여래의 몸이 법계에 널리 변만함을 깨닫게 하니 이런 까닭에 빛을 밝혀 깨닫게 하는 장이라 부른다"고 해석하고 있다. [광명각품]은 앞의 [여래명호품]·[사성제품]과 함께 여래의 身·口·意 三輪을 보임으로써 중생에게 불과에 이르고자 하는 신심을 일으키게 하는 교설이다.
원효는 이 [광명각품]을 네 단락으로 나누면서 또 이를 묶어 크게 두 부분으로 가르고 있다. 앞의 두 단락은 여러 의혹을 제거하고 난점을 풀어서 정법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려는 것이고, 뒤의 두 단락은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덕행을 바로 설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수행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앞의 [여래명호품]에서는 여래의 명호가 시방에 가득하여 여래의 신업이 한량없음을 보였고, [사성제품]에서는 사바세계뿐 아니라 시방세계 중생들에게 맞는 사성제 법문을 통하여 여래의 구업이 한량없음을 보이고 있다. 여래의 명호와 진리의 명칭이 시방일체세계에 두루하다는 그러한 여래의 경계에 대하여 생길 수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을 이 [광명각품]에서 풀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래의 명호가 佛身이 일체에 두루한 까닭에 그를 따라서 두루한 것인가. 아니면 몸은 비록 사바의 현세계에 국한되지만 이름만은 일체에 두루한 것일까. 만일 이름은 일체에 두루하나 몸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몸이 이루어 놓은 신업의 과보는 좁은 영역에 치우치면서 어찌 말로 일체에 미치는 구업의 영향은 넓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는 본래 몸과 말로 짓는 두 가지 업이 모두 한없이 무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름이 두루하듯 몸도 역시 그렇다면 어째서 부처를 다만 부처의 재세시에만 볼 수 있었던가. [광명각품]은 광명으로 이같은 의문을 풀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經에서는 十重으로 일체세계를 두루 비추는 광명을 통해 여래의 색신이 無所不遍임을 나타냈다. 열대목에 걸쳐 여래의 공덕을 찬탄한 것은 여래가 갖춘 내덕이 일체에 가득함을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보살의 덕까지 현시하고 있으니 보살이 부처를 따라 그 자리에 함께 있음을 밝혔다. 이로써 제기된 의문을 남김없이 풀어버리도록 하였는데, 이에 대한 원효의 주석에서도 상즉·상입·무장애법문의 화엄경관이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경문 중 "見者無所有 所見法亦無 明了一切法 彼能照世間 一念見諸佛 出現于世間 而實無所起 彼人大名稱"이라는 문수의 게송에 대해 "법은 있음과 없음을 여의었고 부처는 늘어남도 줄어듦도 없다"고 해석하였다. 또 "無我無衆生 亦無有敗壞 若轉如是相 彼則無上人 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 展轉生非實 智者無所畏"라는 게송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의미지우고 있다.
먼저 人과 法이 얻을 것이 없는 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후에 一과 多가 무장애한 문으로 두려울 바가 없음을 얻는다. 일체법이 일법에 드는 연고로 하나 가운데 무량을 알고 일법이 일체법에 드는 연고로 무량한 가운데 하나를 안다. 그러므로 능히 서로 상입할 수 있는 것은 전전히 서로 거울의 그림자되어 생하고 실제로 생한 것이 아니므로 걸림이 없다.
자아와 세계 어느 것이나 도무지 실체가 아니어서 얻을 것이 없으며, 개체와 전체는 서로 不離의 통일체라서 걸림이 없다. 존재 전체의 의미는 개체 가운데 구현되어 있는 까닭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고, 하나는 전체의 너른 자리에 안온한 까닭에 무한 속에서 개체의 의미를 확인한다. 서로는 서로에 들 수 있는 인연이어서 마치 여러 거울이 서로서로 비추어 만들어 내는 상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어 일체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효의 화엄경관은 {화엄경}의 제목을 해석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원효는 {화엄경}의 갖춘 이름인 {대방광불화엄경}에 대해 법계가 무한함이 대방광이고 행덕이 무변함이 불화엄이라 한다. 대방광을 증득할 법으로 보고 불화엄을 증득하는 주체로 본 것이다. 大方이 아니면 佛華를 널리 두루하게 할 수 없고 佛華가 아니면 大方을 장엄할 수 없다고 하여, 大方과 佛華를 쌍으로 들어서 廣과 嚴의 宗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효의 廣嚴사상은 그가 중생을 교화한 다양한 보살행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Ⅴ. 설화 속의 화엄보살
원효가 화엄과 인연이 깊었음은 그의 생애와 관련된 많은 설화를 통해서도 짐작케 한다. 한국에서 원효의 이름을 붙였거나 관련이 있는 寺庵이, 알려진 것만 해도 70여 군데나 된다고 한다. 척판암에 얽힌 척판구중설화나 천성산 화엄벌 설화는 원효의 화엄가로서의 면모를 잘 담고 있다. '원효가 판을 던져 대중을 구한다'는 글을 써서 던짐으로써 중국 고찰의 천명 대중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이 설화는, 원효의 저술이 당으로 전해져서 중국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는 고사를 암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원효의 화엄가적 모습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판을 던져 중국에 닿았다 함은, {화엄경}이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七處를 法界에 펴신 것임과 유사하며, 또 하나의 판으로 천명이 위기에서 벗어남은 一卽多의 화엄세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추정은 위의 척판의 설화에 이어서 나오는 [화엄벌 설화]에서 확실 해 진다. 신라로 찾아온 천명의 대중을 천성산 상봉에 집합시켜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므로 현재도 그 곳을 화엄벌이라 하며, 그 천명 대중이 거의 도를 깨달았으므로 그 산을 천성산이라 한다는 데서도 원효의 화엄과의 인연을 깊이 헤아려 볼 수 있다.
{송고승전}의 [원효전]에도 원효가 疏釋을 지어 {화엄경[雜華]}을 강의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조에는 "송사가 있었을 때 그 몸을 백그루의 소나무에 나누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의 위계를 초지보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천축산 佛影寺記에 "원효법사는 현재 화엄지에 머무는 대권보살이다"라고 하여 원효를 화엄보살로 지칭하고 있다. 이처럼 설화에서는 원효가 {화엄경}을 강의한 화엄 십지보살로 널리 알려졌음을 전해 주고 있다.
맺음말
이상과 같이 화쟁국사 원효의 화엄사상을 살펴보았다. 원효의 불교세계는 그의 저술과 저술에서 인용한 문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 불교사상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할만큼 방대해서 어느 한 경·한 론으로 그의 사상을 대변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사상을 피력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화쟁의 입장이라 하겠으니, 당시 시시비비되어 왔던 여러 이설과 갈등을 화해시키는데 주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효는 후에 화쟁국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겠다. 원효의 화쟁정신은 {십문화쟁론}을 비롯하여 {열반경종요}·{대승기신론소}·{별기}·{이장의}·{금강삼매경론}·{화엄경소} 등 원효 저술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일심에 근거되고 있는데, 그의 일심관은 두세번 변화가 있게 된다.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관심을 가졌던 일심은 현장이 폈던 유식의 일심이라면, 그가 깨달음을 얻고 입당을 포기한 일심은 기신론에서 담고 있는 여래장 일심이다. 그런데 원효의 일심관은 다시 화엄의 성기일심으로 펼쳐지게 된다. 즉 원효의 일심관은 망식에서 진망화합심으로, 진망화합심에서 다시 여래성의 진여일심으로까지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원효가 무애가를 부르며 중생교화하러 뛰어들 때 읊은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게송도 {화엄경}의 게송이다. {대승기신론소}·{별기}에 보이는 원효의 여래장사상은 그의 교판설에서 일승만교로 분류한 普法 華嚴과도 통하는 것이다.
보법은 相入·相是의 교설이니 至大至小가 同一量인 무애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원효의 화엄사상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화엄경소}이다. {화엄경소}의 [서분]에는 {화엄경}의 핵심교의가 非大非小 非促非奢 不動不淨 不一不多의 무장애 법계법문임을 밝히고 있다. [광명각품소]에서도 有無て增減 등의 상대성을 여의고 相入하여 무장애한 원효의 화엄경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또 {대방광불화엄경}의 제목을 嚴大方 廣佛華의 廣嚴으로 해석한 것은 그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펼친 무애자재한 행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는 설화 속의 원효의 모습과 다르지 않으니, 원효에 관한 현전하는 설화는 원효가 화엄보살임을 말해 주고 있다.
통일 신라를 전후한 당시의 골 깊은 갈등을 화해시키고 민중의 고통을 해결해 준 원효의 화엄사상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갈등과 모순을 풀어나가는 방안을 모색하는데 시사해 주는 점이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
발심수행장//원효
2005.05.21 10:01
한국 불교사에서 출가수행과 발심수행을 직접적으로 권고하는 글은 현존문헌 가운데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이 최초이다. 원효대사는 신라인들의 구심적인 정신원리로 불교신앙을 일반대중들에게 고취시키고자 하는 염원이 간절하였다. 그러므로 원효대사는 불교 본연의 사명이 성취되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자신의 올바른 수행으로부터 비롯됨을 깊이 인식하였고 발심은 보리과를 추구하는 바른 인연임을 믿고 피나는 구도의 행각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원효대사의 '발심수행장'은 출가수도를 근본으로 하며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이 진정한 발심과 수도라 보고 시간을 아껴 젊은 시절에 마음을 내어 부지런히 수행함을 권고하고 있다.
1. 탐욕을 끊고 수행하라.
모든 부처님께서 적멸궁을 아름답게 꾸미신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끊고 수행하신 까닭이요, 수많은 중생들이 불타는 집(火宅)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끝없는 세상 동안 탐욕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막는 사람이 없는데도 천당에 가는 사람이 적은 까닭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 번뇌로 자기의 재물을 삼기 때문이요, 유혹하는 사람이 없는 악도에 들어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애착과 온갖 욕심을 망녕되게 마음의 보배로 삼는 까닭이다.
어느 누가 고요한 산에 들어가 진리의 도를 닦으려 하지 않으리요마는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달콤한 일들에 대한 애욕에 얽매인 탓이다.
비록 산사에 들어가 마음을 닦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힘과 능력에 따라 착한 선행을 버리지 말라. 자기 한 몸의 욕심과 쾌락을 버리면 다른 사람이 성인처럼 존중할 것이요, 어려운 일을 참고 이기면 부처님 같이 받들 것이다.
재물을 쌓아두고 탐내는 것은 악마의 무리와 같은 것이요,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베푸는 보시를 행하는 것은 참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2. 출가하여 용맹 정진하라.
산사가 있는 높은 산과 험한 바위가 있는 곳은 지혜 있는 수행자가 살 만한 곳이요,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깊은 골짜기 또한 수행하는 사람이 머무를 만한 곳이다. 배고프면 나무 열매를 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힌다. 좋은 음식을 먹고 애지중지 보살피더라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며, 비단옷을 입어 보호하더라도 이 목숨은 반드시 마칠 때가 있는 것이다.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당으로 삼고, 슬피 우는 새 소리를 마음의 벗으로 삼아라. 추운 법당에서 절할 때 무릎이 얼음장과 같이 차가워도 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굶주린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여도 먹을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 잠깐이면 백 년이 지나는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인생이 얼마나 되길래 수행하지 않고 게으르며 졸기만 할 것인가.
3. 참된 수행자가 되라.
마음속의 애욕을 모두 여윈 수행자를 사문이라 하고, 세상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도를 닦는 수행자가 호화스런 비단옷을 입는 것은 개에게 코끼리 가죽을 입힌 것과 같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수행자가 이성에게 연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든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재주가 있더라도 쾌락의 유혹이 가깝게 있는 세속에 사는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가엷게 여기는 마음을 내시고, 설사 도를 닦는 힘이 모자라더라도 산사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모든 성현들께서 그를 기쁘게 여긴다.
재주와 학문이 있더라도 계율을 실천하지 않으면 보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도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비록 부지런하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목적지가 동쪽인데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다.
지혜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은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행위는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밥을 먹어 그 배고픈 창자를 위로할 줄 알면서도 진리의 불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은 모르네.
계행과 지혜를 갖추는 것은 굴러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은 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
4.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라.
정성어린 시주를 받고 축원하면서도 그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보시한 시주자에게 수치스런 일이며, 공양을 받고, 경전을 외우며 축원하면서도 그 깊은 이치를 알지 못한다면 또한 불보살님께 부끄럽지 아니하겠는가.
사람들이 더러움과 깨끗한 것을 가리지 못하는 벌레를 싫어하듯이 성현께서도 출가 사문이 깨끗하고 더러움을 판별하지 못하는 것을 미워하네.
세상일의 시끄러움을 버리고 하늘나라에 올라가는데는 청정한 계행이 좋은 사다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지 않고 남의 복밭이 되려는 것은 마치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이를 등에 태우고 하늘에 오르려는 것과 같다. 자신의 죄도 벗지 못하고서 어떻게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행을 지키지 못하고서는 다른 사람의 공양이나 시주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수행이 없는 헛된 몸은 아무리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무리 아끼더라도 보전하지 못한다.
용상(龍象)과 같은 큰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사자좌에 앉아 있는 부처가 되고 싶거든 세상의 향락을 영원히 버려야 한다.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하면 모든 천신까지도 다같이 찬탄하나, 그렇지 않고 수행자가 여인을 그리워하면 착한 신장들도 그를 버리고 떠난다.
흙·물·불·바람의 사대(四大)로 구성된 몸은 곧 흩어지는 것이므로 오래 살수가 없다. 오늘도 벌써 저녁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세상의 향락 뒤에는 고통이 따르거늘 무엇을 탐내랴. 한번 참으면 오랜 즐거움이 되는데, 어찌 도를 닦지 않는가. 도를 구하는 사람이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자들에게 수치스러운 행위요, 출가한 사문이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려는 행위 또한 군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5. 늙으면 수행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막는 말이 끝없이 많은데 탐착과 애욕은 왜 그리 끊지 못하며 닦아야 할 수행이 끝이 없는데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며,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끊을 마음은 일으키지 않는다.
오늘이란 하루는 끝이 없건만 오늘 한 번만 행한다는 생각에 악한 죄는 많아지고, 내일 내일하고 미루는 내일이 끝이 없지만 착한 일은 날마다 줄어들며, 금년이란 한 해가 다함이 없거늘 한없이 번뇌는 계속되고, 내년하고 미루는 내년이 끝이 없거늘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하루가 지나가고, 하루하루가 흘러서 어느덧 한 달이 되며, 한 달 한 달이 지나서 어느덧 한 해가 되고, 한 해 한 해가 바뀌어서 잠깐 사이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망가진 수레는 굴러갈 수 없듯이 사람도 늙으면 수행할 수 없으니, 누우면 게으름만 생기고 앉아 있어도 어지러운 생각만 일어난다. 몇 생애를 닦지 않고 낮과 밤을 헛되이 세월만 보냈는데, 또 헛된 몸을 얼마나 살리려고 이 한 생을 닦지 않겠는가.
이 몸은 반드시 마칠 날이 있는 것인데 죽어서 다시 받는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 급하고 또 급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