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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부채 ‘시한폭탄’, 한국 경제 숨통 조인다

천하한량 2011. 9. 30. 17:20

"한국인은 빚잔치를 벌이고 있다. 지금 한국은 지난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위기 직전 빚더미에 빠진 미국과 별 차이가 없다." 지난 2008년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지켜본 데이비드 미촌스키는 기자에게 '가계 부채가 경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소비자가 빚을 내 '흥청망청' 소비하면서 글로벌 금융 위기가 일어난 것처럼 사상 최고치까지 치솟은 가계 대출이 한국 경제를 파탄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가구당 부채액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당시 미국의 가구당 부채액을 넘어섰다.

가계 부채(가계 대출과 판매 신용 합계액)는 지금 국가 예산의 세 배 가까이 불어났다. 가계 부채는 올해 1분기 10조7천억원 늘어났다. 2분기에는 17조8천억원까지 폭증했다. 지난 6월 말 기준 총 가계 대출은 8백26조원에 이른다. 신용카드나 할부금융 신용액을 비롯한 판매 신용액까지 합치면 가계 신용은 8백76조3천억원까지 불어난다. 소규모 개인 사업자나 비영리 기관이 빌린 금액까지 합치면 개인 부문 부채는 1천6조6천억원(3월 기준)까지 증가한다.










가계 부채가 늘어난 것은 소비 증가와 정책 실패 탓이다. 한국인의 씀씀이는 헤퍼졌다. 올해 1인당 신용카드 발행 수는 5장이다. 2002년 신용카드 발행 수는 1억5백만 장으로 1인당 4.6장이었다. 당시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1백8%였다. 1인당 보유 카드는 2005년 1인당 3.5장으로 줄어드는가 싶더니 지난 3월 5장으로 다시 늘어났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빚은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부는 소비 지출이 급증하는 것을 용인했다. 금리는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고 유동성은 크게 늘렸다. 이에 따라 학생, 주부, 직장인 가리지 않고 학자금, 생활 자금, 전세 자금, 주택 구입 비용 목적으로 대출을 늘렸다.

정부 부처 사이에 손발도 맞지 않아







무주택자와 1주택자들에 한해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적용하지 않기로 한 지난해 9월2일 한 은행의 창구 모습. ⓒ연합뉴스

가계 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금융 당국은 시중 은행을 협박하면서까지 가계 대출 증가 속도를 다잡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가계 부채는 아랑곳하지 않고 치솟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지난 8월6일 '가계 대출 증가율이 월 0.6%를 넘지 못하게 하라'라고 지시했다. 시중 은행의 가계 대출 증가 속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한국은행이 지난 9월7일 발표한 '8월 금융 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 8월 은행권 가계 대출은 전월 대비 2조5천억원 늘어났다. 3조3천억~3조4천억원이나 늘어난 5월, 6월에 비해 증가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올해 52%나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액은 8월에 1조2천억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7월 증가액과 비교해 7천억원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이너스 통장 대출이 1조원이나 늘어났다. 한 곳이 막히면 다른 곳이 부풀어오르는 '풍선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풍선 효과는 대출 창구에서도 나타났다. 은행 대출 창구가 막히자 가계 대출은 비은행권으로 쏠리고 있다. 7~8월 비은행 가계 대출이 5조5천억원 늘었다. 7월 2조1천억원, 8월 3조4천억원이 증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가계 대출 증가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7~8월 가계 대출은 10조2천억원이나 늘어났다. 지난 4년 동안 최고치이다. 전셋값이 오르자 전세 자금 대출이 크게 늘었다. 전세 자금 대출을 비롯해 주택담보대출 외의 가계 대출은 7월 3천억원에서 8월 1조3천억원으로 늘었다. 금융통화위원회는 7월 금통위 의사록에서 '정부의 은행 가계 대출 억제책은 민간 자금 수요를 은행에서 제2 금융권으로 이전시켜 금융권 전체로 볼 때 실질적으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가계 부채는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늘어났다. 1999~2010년 사이 가계 부채는 연평균 13% 증가했다. 같은 기간 경제 성장률은 7.3%에 불과했다. 가계 부채는 지난 2009년 국내총생산(GDP)의 86%까지 불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77%)를 크게 웃돌았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 비율도 2010년 1백46%나 되었다. OECD 회원국 평균치는 1백38%에 불과하다. 로열스코틀랜드은행 소속 경제학자 에릭 류스는 "(한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2003년 신용카드 위기 당시의 1백30%보다 훨씬 높아 주의가 요구된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한 가구가 한 해 지불하는 평균 이자 비용만 88만9천원이다.

가계 부채가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이에 대처해야 할 정부 부처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고 있다. 금융위는 '한국은행이 통화 정책 정상화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가계 부채를 키웠다'라고 비난하고 있다. 시중 통화량은 늘어나고 있다. 광의통화(M2)는 지난 7월 3.2% 늘어났다. 한국은행은 8월 M2 증가율을 3% 후반으로 추정한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가계 부채 증가 속도를 제어하려면 총 유동성 관리가 적절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은 "가계 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한은이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9월8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는 석 달째 금리를 동결했다. 금리 인상에 따른 경기 침체를 우려한 탓이다.

한국은행은 진퇴양난이다. 총 유동성을 줄이려면 기준 금리를 올려야 하나 금리 인상은 소비 위축으로 이어져 경기 침체를 야기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1% 금리 인상은 민간 소비 8조7천억원을 줄인다. 메랄 카라술루 전 국제통화기금(IMF) 한국사무소 대표는 "금리를 1~3%포인트 올리면 부실 가계 부채가 8.5~17%포인트 늘어난다"라고 지적했다. 이 와중에 권도엽 국토해양부장관은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완화할 것을 언급했다. 주택 시장 침체를 막아야 하는 국토부 입장에서는 돈줄을 죄는 가계 부채 대책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주택 시장이 불안정하면 가계 부채 대책은 실패한다. 부동산값이 10~30% 떨어지면 부실 채권은 4%포인트 늘어난다.

총선·대선 앞둔 탓에 전망은 더 어두워







8월11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서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기준 금리 동결을 의결한 후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연합뉴스

일부에서는 가계 부채에 대한 지나친 우려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가계 부채가 크게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까지 임계치에 도달하지 않았고 담보 가치도 충분하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프레드릭 노이만 HSBC 아시아경제연구소 소장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가계 부채 증가율이 오랫동안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금융 안정을 해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당분간 수평선 위에 나타나지 않을 듯하다"라고 말했다. 권혁세 금감원장은 "가계 부채 8백76조원 가운데 주택담보대출이 3백조원가량을 차지한다. 전세 자금 대출도 사실상 담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 신용 대출 상당액이 전세 자금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가계 부채는) 지금 당장 크게 염려할 규모는 아닐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계 부채가 신용 위기로 전이되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계 부채가 통제 범위에서 벗어날 정도로 불어나면 신용 위기를 피할 수 없다. 부실 채무가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신용 위기의 서막을 연다. 지금 시장에서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이가 나타나고 있다. 개인 회생이나 개인 워크아웃 신청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개인 회생은 생계비를 뺀 소득에서 개인 부채를 5년 동안 갚아나가는 제도이다. 개인 워크아웃은 빚 일부를 탕감하거나 만기를 연장하는 제도이다. 지난 9월7일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개인 회생은 2만8천71건이 접수되었다. 신용회복위원회가 운영하는 개인 워크아웃과 프리 워크아웃 신청자는 4만4천8백76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 늘어났다. 1~3개월 단기 연체자를 대상으로 하는 프리 워크아웃 신청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넘게 증가했다. 지난 7월 말 가계 대출 연체율은 0.77%를 기록해 2년5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8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5.3%로 집계되었다. 한국은행은 올해 물가 상승률 목표치 4%를 포기했다. 물가가 지금처럼 오르면 물가 안정을 최우선 임무로 삼는 한국은행은 기준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이 늘어나고 채무를 갚지 못하는 가구가 늘어난다. 세계 경기는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다. 남유럽 재정 위기 탓에 유로화를 통화로 채택한 유로존이 붕괴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마저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는 '더블딥(경기 재침체)'의 공포가 현실화하고 있다. 세계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와중에 내수마저 줄인다면 경기 침체는 피할 수 없다. 소비 지출을 줄이지 않으면 가계 부채는 통제될 수 없다. 정부 당국이 꺼낼 수 있는 마땅한 대책이 없다. 이 와중에 정부 부처 사이에 협조는 원활하지 않다.

전망은 더 어둡다. 과거 어느 때보다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이다. 하지만 정치적 리더십은 선거라는 정치적 이벤트 탓에 발휘되기 쉽지 않다. 20년 만에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내년에 한꺼번에 열린다. 여야 모두 섣불리 표를 잃을 수 있는 금리 인상이나 내핍 정책을 내놓기 여렵다. 이미 여야는 '포퓰리즘(대중 인기 영합주의) 정책'을 경쟁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국내 증권사 소속의 한 연구원은 "선거를 앞두고 돈줄을 죄는 정책은 정치적 자살 행위에 가깝다. 지금까지 선거를 앞두고 내핍 정책을 채택한 정권은 우리 역사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세계 언론 매체는 한국의 가계 부채를 '시한폭탄'에 비유한다. 이제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언제 터지느냐'가 관건이다. 한국은 터지는 시점을 늦추면서 폭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다만 '예측된 위기'는 그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이철현 기자 / lee@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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